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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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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2,648회 작성일 13-04-30 19:36

본문

[남경식의 오산 이야기4 ] 오산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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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2/28 [18:27] ?최종편집:ⓒ 오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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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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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독립항쟁의사추모비,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비로서 오산역 광장에 세워져 있다.?

? ?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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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제의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민족말살정책, 수탈정책과 헌병경찰제도에 맞서 한민족은 분연이 일어나 조국을 되찾기 위해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난 민족대표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현장을 목격한 오산의 세교동 출신 유진홍은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 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유진홍은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상경해 있던 중이었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규합되자 의거할 것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오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14일 오산장에서 시작되어 3월말까지 진행되었는데, 일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결정치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3월 29일(당시 음력 2월 28일-당시는 음력으로 3, 8일에 오산장이 열렸다.) 오산장날에 거사일을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그러다 3월 25일 오산리의 만세운동이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후 오산리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자세히 알아본다.



시장에 모여 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을 유진홍(兪鎭弘)과 안낙순(安樂順) 등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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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喜市)가 유진홍 등 3명의 주동자를 체포하자 안낙순을 위시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높이자, 이에 기가 꺾인 오오키는 체포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석방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이성구(李成九), 이규선(李圭璇),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김용준(金用俊), 유진홍 등이 다시 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유진열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니 죽여라 하며 투석전을 하였다. 이후 오산우편소를 파괴하고, 일본인 거주지로 몰려가 파괴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자 일본 경찰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지역의 3․1운동은 식민지배기구였던 면사무소, 경찰서 앞에서의 실력행사를 보여준 것으로서 당연한 우리의 주권을 공표한 것이다. 오산지역에서 야금야금 거주지를 확장하는 일본인들의 지배력을 부인한다는 실력행사였다.



오산3․1운동의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거의 대부분이 성호면(오산)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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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역 6월에서 1년 8월까지 형을 선고 했다. 이성구(수원군 일형면, 25세, 징역 1년 8월), 김경도(성호면 오산리, 34세, 징역 1년 6월), 공칠보(성호면 궐리, 36세, 태 90), 이규선(진위군 북면, 25세, 징역 1년 8월), 정규환(성호면 오산리, 25세, 징역 1년), 유진홍(성호면 세교리, 34세, 징역 6월), 안낙순(성호면 세교리, 44세, 징역 6월), 김용준(성호면 금암리, 38세, 징역 6월). 이 분들의 직업은 모두 농업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천주교도들의 시작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오산장에서 좀 더 조직적으로 농민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산주민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빛나는 독립운동이었다.







▲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 시위가 있었던?오산중앙전통시장 ???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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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 시위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오산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곧바로 다음날에는 권율의 세마대첩으로 유명한 곳인 독산성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오산지역의 양산동 주민, 산성면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으로 파악되는데 일제히 불을 밝히고 만세의 함성을 소리 높여 일제에 항거한 것이다.



오산지역이 타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배경에는 오산지역의 교육열을 들 수 있겠다. 오산은 일찍부터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사립학교인 신명학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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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 학교를 폐쇄시키고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개교시킨다. 학교가 타 지역보다 일찍 존재한 것은 교육열이 높았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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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배경은 천도교의 교세가 있었음을 배경으로 한다. 천도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많이 참여하였음은 이로 알 수 있겠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오산지역도 농업적인 경제침탈이 가속화되었고, 이러한 사안도 만세운동의 배경으로 볼 수 있겠다.



일제의 무단침탈과 억압은 민족의 자존적 존립에 매우 큰 타격을 주었으며, 광복한 지금도 남북 분단이란 고착적인 민족의 대립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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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3․1절을 맞이하는 자세에는 이러한 우리의 반성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는 기념일이 되어야 하겠다. 오산의 시민들은 용감했다. 자랑스럽다.



3․1독립항쟁의사추모비,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비로서 오산역 광장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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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 /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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