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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 본 오산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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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2,933회 작성일 13-04-30 19:32

본문

[남경식의 오산 이야기2] 유물로 본 오산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
한성백제 사냥터는 지금 오산의 부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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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1/29 [10:28] ?최종편집:ⓒ 오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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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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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이 시로 승격된 날은 1989년 1월 1일이다. 이전 시기는 수원과 화성 등에 속한 조그만 속지였다. 벌써 오산시로 승격된 지 근 한세대가 지나고 있다.



오산이 시로 승격되고 2번의 오산시의 역사책인『오산시사』가 편찬․발간되어 활용되고 있다(1차 1998년, 2차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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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오산시사』가 발간되던 해의 인구가 5만 9000여명이었으나,『2009년오산시사』가 발간된 해의 인구는 15만 명이 넘었다.?





▲ ?2009년 발간된? 『오산시사』?? ?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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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현재 오산시의 인구는 20만이 넘고 있으니 오산의 팽창,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 말, 우리가 살고 있는 오산시의 면적은 42.76 ㎢이다. 그 중 농경지는 12.53㎢ (29.3%)이며 임야는 12.70㎢ (29.7%), 기타17.53 ㎢ (41%)이다. 그리고 행정구역은 6동 268통 1,807반의 조직을 갖고 있다.



면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의 타 지자체에 비하여 작은 도시이나, 그러함에도 오산은 시세에 비하여 다양한 문화시설과 사통팔달 발달한 교통 등 살기 편리한 수도권에 위치한 작지만 강한 도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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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지명에 이러한 다양함과 정서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많은 유입인구의 영향으로 오산시의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의 젊은 도시로 전국적으로도 젊은 도시에 속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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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로 오산시민들이 오산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무척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체성의 체득을 우선『오산시사』열람을 통해 체득하기를 추천한다.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현재 오산시의 역사책인『오산시사』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전국 1000여 곳의 공공도서관, 전국 270여 지자체 문화원, 경기도․서울 소재 대학도서관, 경기도 소재 대학박물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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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산의 중앙도서관과 청학도서관, 오산문화원 등에서도 열람 가능하다. 그러나 대출은 불가하므로 불편함이 따르겠으나 전국 어디서든 찾아가서 펼쳐놓고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오산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전자책 형태로 읽을 수도 있다. 집에서 편하게 접속하여 읽으면 된다. 24시간 열람이 가능한 것이다.



자, 그러면 오산의 역사 기원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오산시 경내에서 일어난 역사 기원을 유물과 문헌으로 나눠서 알아보겠다.



유물로 본 오산의 역사는 구석기시대부터 시작한다. 지금까지 오산시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오산 갈곶동 유물산포지 1에서 긁개, 오산 갈곶동 유물산포지 2에서 밀개와 오산 청호동 유물산포지에서 타제석기 등 3개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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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 유적은 발굴조사가 아닌 석기가 채집된 유물산포지로 확인된 것으로서 정확한 유적의 성격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구석기시대의 유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 ?오산천 전경?? ?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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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의 석기가 오산에 존재한다는 것은 구석기시대에도 오산에 사람이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임에는 틀림없다.



신석기시대의 유물로서는 오산시에서 확인된 유일한 신석기시대 유적인 오산 가장동유적에서는 수혈 1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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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유물로는 단사선문, 횡주어골문, 종주어골문 등이 시문된 즐문토기편 등이 있다. 오산 가장동유적이 조사됨에 따라 오산시에서 신석기시대에 주민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외삼미동에 고인돌, 금암동에 고인돌 등 오산 여러 곳에 고인돌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 오산에 청동기시대도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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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은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 유물로 확인 된 것이다.



문헌상 오산 연혁의 시작은 삼한시대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오산은 마한, 진한, 변한 중에서 마한 지역에 속했으며, 역사학자 이병도에 의하면 모수국( 현재의 오산, 태안, 정남, 동탄, 양감, 향남, 봉담, 매송면 일대)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은 학자에 따라 위치 비정이 차이가 있다.



모수국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한때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의해 고구려에 편입되며 한반도의 격전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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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삼국사기』권 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은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이 지역이 한성백제의 사냥터 곧 군사훈련장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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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부산은 현재 오산시 부산동이다. 그리고 『삼국사기』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11년(기원전 8년) 7월조에 “독산책과 구천책의 양책을 설비하고 낙랑의 침략을 막았다.” 는 기록과 『삼국사기』권 제3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18년(AD373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으므로 왕은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오산의 독산성이 격전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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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산천 과 오산동 전경 ?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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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옛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의 역사나 주민이 살았다는 증거는 약 2천 년 전 이상으로 추정되며, 청동기 시대와 겹치는 삼한시대 이전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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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한다면 문헌상 오산의 연혁의 시원은 삼한과 삼국시대 이전부터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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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오산지역은 수원군 오산면으로 인구 6,000여 명의 교통요충지에 있는 농촌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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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현 수원시를 제외한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되며, 오산면은 화성군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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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지정된 화성군 오산면이 1960년 화성군 오산읍으로 승격되고, 1989년 1월 1일 화성군 오산읍이 오산시로 승격되면서 실제적 오산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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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천과 오산동 사진설명: 오산동이 전면에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대개가 농경지였고, 도시화되기 전에는 장마 때 일부 지역은 침수가 자주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음식물 찌꺼기나 유기물 등이 많아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던 곳이기도 하다.)





▲ 남경식 위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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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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