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의 독산성전투와 세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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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의 오산이야기 6회] 권율의 독산성전투와 세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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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4/08 [10:28] ?최종편집: | ⓒ 오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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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 |
‘남경식의 오산이야기’에서는 독산성의 구조와 독성려왕릉, 권율의 독산성전투와 세마대, 정조와 독산성, 보적사와 독산성산림욕장 순으로 오산의 대표적 유적지 독산성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를 가지려 한다. ?http://www.osannews.net/sub_read.html?uid=4727§ion=sc19§ion2=칼럼
독산성에는 독산대첩(세마대첩)의 승전을 기념해 지은 장대가 있는데, 그 유명한 권율의 세마대다. 선조25년(1592년) 12월에 시작된 오산시 지역의 ‘독산성 전투’와 화성시 봉담면 지역의 ‘삼천병마골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긴밀하게 연계해 이룬 승첩으로 행주대첩이 있게 되는 밑거름이 된 전투였다. ? 1592년(선조25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한성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침략하였다. 5월 정암진전투, 7월 이치전투, 10월 진주대첩 등으로 번번이 좌절되고, 해상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연전연패 하면서 호남과 해로를 통하여 한양에 진출한다는 본래의 계획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 독산성이 군사적 거점으로 이용된 것은 전쟁 발발 초기에 전라, 경상, 충청의 3도 근왕병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삼남의 병사들이 인심을 잃어 왜적을 만나면 모두 궤산했으므로 의병이 일어났다.『선조수정실록』권25, 25년 6월조에 의하면 “의병은 왜적과 싸워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인심과 나라의 운명은 오직 그들의 힘으로 유지되었다.” 고 할 정도로 국란 극복의 큰 힘이 되었다. ? 왜군은 한양으로 진격할 때 용인으로 거쳐 갔으므로 오산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그러나 거점이 용인지역인지라 항시 피습대상지역으로 수원은 여러 번 약탈을 당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독산성을 중심으로 삼남지역의 근왕병이 주둔하거나 북상하는 주요한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 첫 번째로 수원성에 도착한 것은 1592년(선조25년) 6월 3일에 전라감사 이광의 3도 근왕병들이었다. 6월 5일과 6일에 양일간에 걸쳐 전개된 용인전투에서 근왕병 5만 명이 왜군 2천여 명에게 대패함으로서 삼남근왕병은 흩어지게 되고 조야가 모두 실망하고, 왜군의 살육과 약탈은 수원 인근까지 자행되고 있었다. ?
? 용인전투 대패 이후 1592년(선조25년) 6월 23일에는 새로이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3,000명의 군사와 함께 북상해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간민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기내의 사민이 많았다. 그리고 김천일은 종사관 송제민으로 하여금 충청도 의병의 모집을 지시하였다. 수원부사 출신이기도 한 김천일은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고 창의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곧 강화도로 들어갔으며, 그 대신에 종사관인 송제민을 독산성에 남겨두었다. ? 9월 조정은 홍계남을 수원판관에, 9월21일에 조경을 수원부사로 임명하였고, 이들은 훗날 휘하 병력을 이끌고 권율 휘하로 들어간다. ? 한편 전라순찰사 권율은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방어사 황진에게 이치를 지키게 하고, 도내의 병력을 재정비하였다.『난중잡록』에 의하면 1592년 9월 22일에 권율은 휘하 장수들에게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가 되어 버렸지만, 도성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도성을 수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진을 하자 각 고을 수령과 의승장 처영 등이 함께 따랐다. ? 권율 휘하에는 수원부사로 조방장에 임명된 조경, 의병장 변사정, 의승장 처영, 전라도 병사 선거이, 초모사 변이중, 의병장 임희진 등으로 이루어졌고, 10월에는 직산에 도착하여 양남도체찰사 정철을 만났다. 정철의 명령으로 북진을 멈추고 관내를 지키고 있었다. ? 이 상황을 행재소에 상황을 보고하자, 선조는 차고 있던 검을 하사하며 “모든 장수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이에 권율은 북상하여 1592년 12월에 독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더 이상 북상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백광언을 따라 북상하여 용인전투에서 무리한 공격을 하여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 한편 한성에 주둔하던 왜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도성에 주둔한 왜군을 독산성으로 급파하였다. ?
왜군은 독산성 주위 3곳에 진을 치고 고립시킨 다음 공격하여 왔지만 권율은 매복과 기습전을 펼치며 성문을 닫고 지켜나갔다. 지형적인 조건을 자세하게 살핀 적장은 성안에는 물이 별로 없을 것이라 여기게 되었고, 부하에게 물 한 지게를 지어 산 위에 있는 권율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 사실 독산성엔 물이 부족하여 극심한 식수난을 겪고 있었다. ? 권율은 즉시 성 아래의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 흰 쌀을 말위로 쏟아 붓게 하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적장의 눈에는 물이 넘치는 것으로 보였다. ? 이렇게 독산성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차에, 남부지방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왜군의 후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조급해진 왜병들은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한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왜군은 5일간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과천을 거쳐 한양으로 퇴각하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는데 봉담면의 ‘삼천병마골전투’는 이때의 전승지인 것이다. ? 권율은 1593년 1월 중순까지 독산성에 머물다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그 후 권율은 1593년(선조 26년) 2월 12일 하루 만에 행주대첩에서도 이겨 서울을 다시 찾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독산성 전투가 밑받침이 되어 행주산성에서 하루 만에 왜적을 섬멸하게 된 것이다.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김시민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불린다. ? 이 독산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선조의 명령에 따라 장대가 건립됐고, 세마대(洗馬臺)라 불리게 됐다. 몇 번의 중수를 거치고, 그 후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의 파괴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을, ‘세마대재건촉진대’를 조직한 당시 서랑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의 염원과 노력으로 1957년 8월 15일 세마대를 본래의 터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세마대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이다. 오산을 가장 오산답게 알려주는 큰 역할을 한 것이 이 권율의 세마대첩이다. 독산성 존재의 큰 의미이자, 오산시민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녀들과 함께 이곳을 탐방하면 호국의 정신을 심어주는 산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 이왕지사 우리가 권율장군을 오산시를 빛내는 대표적 인물로서 추앙한다면, 임진왜란의 영웅인 권율의 이름이 부여된 기념물이나 공공건물 또는 도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이는 사항이다. 공공정책 입안자는 유념할 일이다.
? ? ? ? 남경식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ks2020@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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