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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의 구조와 독성려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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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2,635회 작성일 13-04-30 19:38

본문

[남경식의 오산 이야기 5] 독산성의 구조와 독성려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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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3/25 [15:10] ?최종편집:ⓒ 오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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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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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식의 오산이야기’에서? 독산성의 구조와 독성려왕릉-권율의 독산성전투와 세마대 정조와 독산성?보적사와 독산성 산림욕장 순으로 실어 오산의 대표 유적지, 독산성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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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산성의 치. 우리 민족이 쌓은 성의 독특한 특징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내밀어 쌓은 성의 돌출 구조물. ? ? ? 오산시민신문




오산은 예로부터 군사전략상 요충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선점을 위해 벌이는 전쟁의 참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또 고려시대에는 서해안 내륙(수원, 안성)에까지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독산성대첩(세마대첩)이 조선의 안위를 결정짓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고, 그리고 최근에는 김일성이 일으켰던 6.25전란까지도 오산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오산의 방어선 구축이 각 시대 공히 독산성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산성의 구조와 역사, 의미를 알아보도록 한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석대산, 향로봉이라고도 불렸던 독산(禿山)에 소재하는 백제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산성이다. 삼국시대에는 독산성, 조선시대에는 독성산성, 독성, 독산성, 독왕산성, 독추성 등으로 불리다 세마대첩 이후에는 세마산성으로도 불리었다. 지금은 독산성으로 통일됐다.



독산성에는 권율장군의 기념 장대인 세마대와 군진의 사찰인 보적사가 함께 있다. 독산성과 세마대 터를 함께 묶어 사적 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독산성 북문. ? ? ? 오산시민신문




독산성의 축성 형식은 산 정상 80% 능선에 세운 테뫼식 산성이다. 원래 350m의 내성과 1100m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외성만 있는 상태이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발발일)에 석성으로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축성 기법은 성의 높이가 높지 않아 수직에 가까운 각도를 주어 축석되었다. 독산성에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축성 특징인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8개의 치(雉)가 있고, 성문은 동, 서, 남, 북 4개에 남문과 서문 사이에 암문이 있어 5개가 존재한다. 영조 때 편찬된『해동지도』「수원부」에 보면 성의 누각이 남문과 서문에 있었는데, 지금은 누각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문의 크기는 남문과 서문 순으로 크다. 우마가 지나다닐 정도이다. 따라서 주 출입문은 남문과 서문으로 추정된다.



독산성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에 2건의 기록이 보인다. 백제 온조왕 11년조에 “독산책과 구천책의 양책을 설비하고 낙랑의 침략을 막았다.” 는 기록과 신라 내물이사금 18년조(백제 근초고왕 28년)에 “백제의 독산성주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으므로 왕은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 기록에 보이듯이 독산은 기록상 오산 최초의 지명이기도 하다.





▲ 향토사학자 임종삼이 진사왕릉으로 비정한 통봉. 독산성 남문에서 촬영. ? ? ?오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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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에는 진남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독성려왕릉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기전영지(畿甸營誌)』「수원도호부 고적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은 수원도호부 남쪽 삼십 리에 위치한 독성산성에 있다. 경진년(1760년) 장헌세자(사도세자)께서 온양온천 행차 시 독산성에 이르렀을 때, 군장 이두섭이 이곳에 어떤 고적이 있다고 아뢰었다. 진남루 아래의 산기슭을 가리키며 이곳에 한 개의 큰 무덤이 있는바 예로부터 여왕릉이라 불린다.”



이 기사의 독성려왕릉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연구된 설 중 여러 시대, 왕 또는 왕족을 비정하는 설 등이 있으며, 독성려왕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러 설중에서 백제의 제16대 왕 진사왕 여휘(餘輝)의 능으로 비정하는 설을 가장 흥미롭고 가장 타당성 있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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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임종삼은『독산성2003, 오산문화원』에서 독성려왕릉의 려(麗)를 진사왕의 이름(휘)인 여휘의 여(餘)로 보고, 진사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공격해오자 진사왕(백제 제14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제15대 침류왕의 아우이며, 침류왕 사후 태자 아신이 어려 태자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대신 오름)은 싸울 생각은 않고 구원(지금의 부산동, 갈곶동 등지라는 설)에서 사냥만하다가 10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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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1월 왕이 구원행궁(지금의 융?건릉 부근이라는 설)에서 갑자기 죽어 아신왕(제17대왕)이 등극했다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백제 진사왕이 무례하여 왜왕 응신이 기각숙니, 우전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보내어 그의 허물을 책망하니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과하였다는『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아신의 등극 과정을 아마도 아신이 정변(아신세력이 여휘를 살해하고 본래 자신의 정권을 되찾음)을 일으켜 정권을 잡지 않았겠는가하는 해석을 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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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더 나아가 정권을 잡은 아신왕이 정적인 죽은 진사왕을 도성인 한성에 옮기지 않고 독산성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설이다. 임종삼은 그래서 왕릉이 이곳 독산성 남쪽에 있게 됐으며, 진사왕릉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독산성 남쪽 통봉에 비정까지 한다. 임종삼은 『독산성2003, 오산문화원』에서 이 설을 제기할 때 통봉의 발굴을 건의 제안한 적도 있다. 우리는 이 독성려왕릉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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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식 위원 ? ? ?


남경식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ks20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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