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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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산에 오다
김길수
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것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아 적군을 격퇴하고 이겨야하는 군인정신이 깃들어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날부터 사회에 대한 두려움 없이 1년여 넘게 잘 견디어오고 있다. 내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성남이다. 성남은 사실 개발독재의 부산물로 급조된 도시이나 분당이 형성되어 오늘날에는 넘쳐나는 예산을 주체하지 못하여 호화 지자체 청사를 지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그러한 도시이다. 그곳에서의 8개월은 내게 있어서 값진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사실 스스로를 일컬어 대한민국! 아니, 세계에서 가장 교회 관리를 잘하는 사찰 집사라고 자부하고 있고 실제로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인정은 인정이고 내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만큼 교회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최고의 대우를 받고 싶었고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없는 전 근무지의 교회 사정 때문에 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오산 교회에 자원을 하여 담임목사님과 관리장로님의 청문을 거쳐 당당히 오산교회의 일원으로 오산에 오게 되었다. 나는 오산에 대해서는 천하에 문외한이다. 오산이 그저 다섯 개의 산으로 형성된 도시인줄 알았는데 아뿔싸! 이곳에 와보니 산이 보이지 않아 내 무식의 소치가 드러나고야 말았다. 하긴 성남처럼 산이 많은 곳도 없다. 옛날 선배들은 어떻게 그런 산에 집을 짓고 살 생각을 하였는지 현대를 사는 나는 그들에 대한 외경심까지 들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의 성능이 세계에서 각광 받는 이유는 성남 산동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경사 30% 이상 되는 산을 넘어 다니는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단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술 개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견고한 차체를 장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우답(愚答)이니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은 정답으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우습게도 내가 판단할 때 오산은 우리 오산 교회 본당 정문 앞에 펼쳐진 주차장 올라오는 길이 가장 가파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하튼 나는 오산이 다섯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까마귀가 많이 사는 산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인터넷을 뒤져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읽힌 오산에 대한 지명의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한자로 오(烏)가 들어간 땅은 오산(烏山)뿐 아니라 \'오소(烏沼)\', \'오정(烏井)\'같은 것이 있고 그 이름은 \'가막소\' \'까막샘\'과 같이 부르고 있다. 따라서 \'오산(烏山)\'역시 \'가막산\' \'가막뫼\'와 같이 불린다. 오산시의 관문인 오산역은 1905년 1월 1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시 1900년대 초 경부선을 따라 철도가 부설되면서 이곳에 역사를 짓게 되었는데 많은 까마귀 떼가 날아들었으며 그래서 오산시의 관문인 역 이름을 ‘오산역’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일부에서 이야기하듯 \'모양이 까마귀처럼 생겨서\' \'까마귀 떼가 많이 날아와서\'와 같은 오산시의 유래는 사실로서 인식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까막샘의 경우에는 \'나무꾼들이 샘가에서 점심을 먹고 흘린 것을 주워 먹기 위해 까마귀 떼들이 모여듦으로’ 그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으뜸’, ‘높다’, ‘신성하다’는 뜻인 옛말에서 나온 우리의 땅 이름 줄기라고 할 수 있다고 하니 옛 선인들의 혜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가막’, ‘까막’을 소리로 옮겨 적은 땅 이름이 한자로 된 ‘가막(加漠)’이고 뜻으로 옮겨 적은 것이 ‘오(烏)’이다. 그러므로 까마귀로 유래를 찾는 것은 한자 ‘오(烏)’를 의식한 것 일뿐 참다운 유래라 할 수 없다. 예로 충남 홍성군 광천읍 신진리의 오루산(忠南 洪城郡 廣川邑 新津里의 烏樓山)을 일명 오성산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까마귀가 사는 산이라는 뜻이 아니라, 신성하고 신령한 산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 오산도 신성하고 신령한 도시로 생각하면 무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정확하게 2009년 11월 20일(금) 오산에 입성했다. 벌써 한 달 여가 지났지만 내 딴에는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달려왔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정체된 그런 교회 분위기에서 생활하다가 활기 있게 초침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교회에 오게 되니 나도 따라서 활기 있게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누구와도 등을 진적 없고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근무했던 만큼 그 점만큼은 내 자신 걱정을 하지 않는다. 절친했던 군대 친구가 나보다 훨씬 먼저 전역을 하고 지금은 백석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성직자의 길을 가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 친구 왈 “자네 같은 사람이 신학대학원에 가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을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며 이렇게 사족을 달았다. “글쎄! 모두가 자기 좋다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면 사찰은 누가 하나 앞으로의 교회 사찰도 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나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국문학(國文學)과 신학이 어우러지면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이 일도 누가 하든지 꼭 해야 할 일이므로 그 일을 내가 감당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글을 쓰는 것 빼고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쓰레기 분류하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내가 오기 전 오산 교회의 쓰레기 분리 현장은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교직에서 은퇴하신 노(老 )장로님께서 혼자 그 ‘인간이 생산해낸 최종의 생산물이 다양하게 혼재 된 현장’을 감당하시면서 고생을 하시는 모습에 “이것만은 꼭 내 능력을 발휘하여 깨끗하게 관리 하겠습니다”고 담임목사님께 말씀 드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고 능히 해내고 말았다. 나는 오산 교회에 넘쳐나는 쓰레기를 깔끔하게 분류 처리하기 위하여 부임하였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쓰레기 처리 문제의 애환은 시간이 나면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게재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 달여 동안 나를 사랑해주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 성도님들께 이 훌륭한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아울러 졸필을 게시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오산에 살면서 오산을 사랑하고, 오산교회를 사랑하고, 오산교회에 속한 많은 성도님들을 사랑하며 살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2010.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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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와 집사님! 글에 군기가 파!파~악~! 들어가 있습니다. 집사님의 청아한 눈빛은 늘 무언가를 사색하시는 눈빛입니다. 집사님의 꿈처럼 교회의 멋진 관리직이 전문직으로 인식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법이 바뀌어서 아파트는 주택관리사가 반드시 관리소장의 조건이듯이 이제 일정 규모의 건물역시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관리직 역시 회계, 건물관리 등의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관리인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못했던 쓰레기 분리수거가 그동안 사실 우리교회에서 전혀 되지 못했던것을 사명감까지 가지시고 노력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일에 우리교회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이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할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사님의 노력에 늘 감사드립니다.

님의 댓글
작성일읽고 싶은 글, 재미난 글입니다. 앞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집사님의 글.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