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지/담안 형제들에게 보낸 글(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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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지
김홍진 목사
요나서1:1-3
호주의 시드니에 교회처럼 보이는데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붙어 있지 않은 빌딩이 있었습니다. 건물 이름은 \'st. Andrew\'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st Andrew 다음에는 Church 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말이 없는 것입니다. 즉, 성 안드레 교회라는 말인데 교회라는 단어는 떼어버리고 건물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도 떼어버린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유명한 식당입니다. 메뉴판이 바깥에 나와 있고 장식도 요란합니다. 한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식당을 할 바에는 저 종각을 통째로 싹 잘라 버리고 교회 모양이 안 나도록 꾸미면 안되나?\' 그랬더니 직원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지금 저 교회모양이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던 강대상은 A석입니다. 거기서 술 마시고 음식을 주문해 먹습니다. 그 다음 성가대석은 B석입니다.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부릅니다”
교회가 빗나가니 유흥음식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하는 강대상은 술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본질에서 빗나가면 타락입니다. 원 상태에서 빗나가면 탈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빗나간 것을 즐깁니다. 빗나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 된 성품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빗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빗나가고 싶은 유혹이 있지요? 빗나가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그러나 마음이 들어봤다면 속으로 아멘.
오늘 본문에도 빗나간 한 인물이 나옵니다. 요나입니다. 빗나간 요-나가 문제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빗나갔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외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빗나갔습니다. 빗나가 다시스로 도망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빗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분부한 사명에 빗나가버렸습니다.
빗나가면 잘 되는 기분도 들 때가 있습니다. 빗나가면 오히려 일이 잘 들어맞는 것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빗나가면 상황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가끔 빗나가고 싶지만 빗나가는 결과는 비극입니다. 빗나간 결과 한 때 즐거운 것 같지만, 결과는 상처와 아픔뿐입니다. 아예 빗나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빗나가지 않고 제 길로 계속 갈 수 있을까요? 빗나가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빗나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첫째, 빗나가지 않기 위해, 빗가가고 싶을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라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자 내가 누구다? 다함께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빗나가면 안되지요.
요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나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비둘기 같은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가 어찌 악한 죄와 동행하며 빗나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써 우리는 빗나갈 수 없습니다. 자녀는 자녀답게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루마니아의 푸로레스코 목사가 공산당에게 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고 했습니다. 공산당들은 목사를 회유시키기 위하여 비인도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그의 11살짜리 아들을 그의 앞에서 발가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끓는 물을 코에 부어 넣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아들이 “아빠” 부릅니다. 아빠는 “그래 아들아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이겨 내야돼“ 그러나 푸로레스코 목사는 자기가 고문을 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는데 아들이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푸로레스코 목사님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고문을 당하던 11살짜리 아들이 외칩니다. 아빠. 아빠가 예수님을 부인하면 나는 아아빠의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조금만 참으세요.“ 아버지는 아들의 말 때문에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의 믿음이 더 좋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공산당에게 항거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말이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자녀로서 어떻게 자녀의 신분을 빗나갈 수 있습니까? 자녀는 영원히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7절에서 9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녀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빗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를 지을 때가 있지요?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의 말씀입니다.
마치 군대간 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아빠의 아들이다. 아빠의 아들은 나쁜 짓을 하지 않지? 양심을 속이고 죄를 지을 수 없지?” 마치 이런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라면 자녀로서 신분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빗나가고 싶지만 빗나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이면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만들어 놓는 길에서 인생을 거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빗나가고 싶은 유혹이 있을 때가 있어요. 그 때 다짐하십시오. “내가 누구인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라고 다짐하면서, 빗나가지 않고 온전한 믿음의 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빗나가지 않기 위해, 빗나가 싶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다” 라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빗나가고 싶지만 빗나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는 결코 그 사명에서 빗나갈 수 없습니다. 그 사명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사명에서 빗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명에서 빗나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명이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명에서 빗나가면 사명자의 생명은 끝납니다. 사명자가 사명을 잊어버리면 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결코 빗나가서도 안되며 빗나갈 수도 없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사명자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빗나간 것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만 보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하면 빗나간 것입니다. 니느웨로 가야하는데 다시스로 가는 것은 빗나간 것입니다.
빗나간 사명자는 사명에서 빗나갈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 빗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빗나가면 삶에서 빗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빗나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는 삶에서 빗나갈 수 없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1997년 <타임>지에 빌리 그래함 목사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지금은 파킨슨병과 투병 중에 있어서 몸은 나날이 여위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빌리 그래함 목사님만큼 탁월한 전도자를 또 찾을 수 있습니까? 아마 수적으로 따져서 그 만큼 많은 사람을 구원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유명한 전도자로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은 사생활에서조차 흠이 잡힐 만한 행위를 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부인 외에는 어떤 여자와도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철칙을 평생 지킨 사람입니다.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을 때 그 부부가 빌리 그래함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힐러리 여사가 빌리 그래함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였다고 합니다. 주지사 부인이 식사를 함께 하자는 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나는 당신 같은 미인과 단 둘이 앉아서 식사할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거절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배우고 따라야 할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힐러리 여사와 단 둘이서 식사하는 행위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명자이기 때문에 철저히 자기를 관리하는 모습이 존경할 만 하지 않습니까? 사명자가 빗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이 세상에서 빗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사명만 헌신한 것이 아니라 삶도 이미 드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다 있습니다. 그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빗나갈 수 없습니다. 사명자는 삶에 있어서도 빗나가고 싶지만 사명자이기 때문에 빗나갈 수 없습니다. 내가 빗나가면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사명에서 빗나가면 내가 존재할 가치를 상실합니다. 사명자가 빗나가면 사명자만 빗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명도 빗나가게 됩니다. 사명자의 헌신은 사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가 사명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도 빗나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명을 받은 자라면 사명에서도 빗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사명자라면 삶에서도 빗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명자로 삼았습니다. 마땅히 이 땅에서 해야할 일이 있고 감당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하는 그 날,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온전한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빗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자이기 때문에 모든 믿음과 삶에 있어서도 빗나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빗나가지 않기 위해, 빗나가고 싶을 때 “나는 하나님의 샘풀이 다” 라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빗가갈 수 없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샘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본보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이런 우리가 빗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빗나가면 하나님의 이미지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빗나갈 수 없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선장이 요나에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께 구하라” 그랬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지 않게 하시지 않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선장은 요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요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샘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빗나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샘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샘플, 하나님의 모본입니다. 그래서 빗나갈 수 없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언론인이자 무신론자인 마가릿지라고 하는 사람이 인도의 켈커타에 여행할 때 테레사 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3일 동안 그 수녀와 함께 지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3일 사이에 이 철저한 무신론자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는 내가 알 수 없으나 무엇이 한 인간의 생애를 그토록 온전히 헌신케 하였단 말인가. 자기를 버리고 그토록 온전히 헌신을 하는 데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도 예수 믿겠다." 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돈 스티븐이라고 하는 사람이 87년도에 미국에 있는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조사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라는 질문에 20%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80%는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가까운 사람이 예수 믿고 그의 간증을 듣고 그의 삶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80%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샘플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샘플입니다. 하나님의 샘플이 빗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빗나가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빗가갈 수 없습니다.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40대 이후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만재씨기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쓴 책입니다. 교회에 안 다니든, 다니든 교회 가기 싫어지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77가지를 뭉퉁그리면 2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는 교회의 이미지가 안좋다는 것입니다. 고리타분하고 시끄럽고 지나치게 모임을 강조하고 등 교회의 인상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안 좋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다는 것입니다. 그의 책에서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답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맘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매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왜 빗가가서는 안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샘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무너지게 보입니다. 우리가 빗나가면 하나님이 빗나가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빗나갈 수 없습니다. 저의 말에 동의하시면 아멘 합시다 <아멘>.
맺는 말
신앙생활에 신선함을 잃어버리면 아주 따분한 삶이 됩니다. 신앙생활에 멋과 기쁨을 상실하면 아주 질 낮은 수준의 삶이 됩니다. 이런 삶에는 지루함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누추한 삶에서 우리는 빗나가고 싶은 생각을 가지곤 합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이것은 유혹입니다. 빗가가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가져 봅니다. 그러나 빗나갈 수 없는 이유는 그 결과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빗가간 결과는 결코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마지막에 가슴을 치고 통곡할 일만 만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빗가가고 싶지만 빗나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빗나가고 싶지만 결코 빗나갈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빗나가고 싶어도 빗나갈 수 없어요. 왜요? 우리는 하나님의 샘플이 아닙니까?
형제 여러분, 믿음의 삶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이 때가 빗나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기회가 아니라 유혹입니다. 결코 그 유혹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상, 내가 하나님의 사명자인 이상, 내가 하나님의 샘플인 이상, 결코 빗나갈 수 없습니다. 빗나가서도 안됩니다. 오직 이 길, 하나님의 원하시는 한 길, 이 믿음의 길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빗나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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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및 환경의 피해자
오래 전에 본 굿 윌 헌팅 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윌은 미국 MIT 대학의 청소부로 폭력전과, 절도전과 등을 가진 반항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의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천재적인 수학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MIT대학의 램뷰 수학 교수가 그의 재능을 우연히 발견하고, 아깝게 여겨 여러 상담가들에게 보내보지만 상담가들은 번번히 윌에게 두 손을 들고 만다. 하지만 램뷰 교수는 대학동창인 숀 심리학자에게 그를 보내 결국 변화시키고 만다.
숀 심리학자가 윌에게 하는 말 중에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사실 그는 어려서 양부모님의 학대 등으로 인하여 그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된 것이었다.
숀 심리학자가 윌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 인생은 모두 다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환경에 의한 피해자일 수도 있고, 부모님에 의한 피해자일수도 있고, 사회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언젠가 우리 작은아이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기에 야단을 쳤다. 그런 후 아이는 밖에 나가고 아내와 단둘이 남았는데 아내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조금 전에 작은아이가 말하는 것을 보고서 야단을 쳤지요.
난 우스워 죽는 줄 알았어요.
작은아이 하는 모습이 당신이 하는 것과 한 치도 안 틀려서요.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작년엔가 본가에 가서 어떤 일로 인해서 내 어머니 보는 앞에서 아내에게 화를 많이 낸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어찌 그리 네 어버지와 똑 같냐? 세라 에미 네가 고생이 많다.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대로 그대로 행하고 있고, 내 아들은 내게서 보고, 배운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 성도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을 받는 집사님이 한 분 있었다. 교회의 모든 일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그렇다.
성장과정을 알고보니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계부 밑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야단을 많이 맞으며 살았기에 그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이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사랑을 베푸는 방법을 몰라 늘 다른 성도들과 부딪쳤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 잘못 만나 그런 성품, 그런 삶의 틀을 갖게 된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나 그 때는 그런 사실을 몰라 치유해주지 못한 점이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이 좋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할 때 \'저 사람이 왜 저럴까\' 하고 좋지 않는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닌 것 같다.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습득한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로서는 자신의 삶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부모 등의 타인 혹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부분이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타인 혹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좋지 않은 습관들이 나를 지배하거나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할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임으로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종교생활\'과 \'신앙생활\'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금이나 은 같은 보석을 캐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을 캐내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왜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며 삶의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것일까? 만일 그 말씀이 성경에 근거한 진리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그 이유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의 씨를 뿌리는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길가, 돌밭, 가시밭, 좋은 밭으로 비유하셨다. 길가는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돌밭과 가시밭도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환란이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혀서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
그러나 좋은 밭에는 씨가 뿌리를 내려 생명이 싹트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 씨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제주도의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가 중국에서 날아 와서 자라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작은 씨의 생명력에 놀랐던 일이 있다. 그러므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문제는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마음 밭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진리의 말씀의 씨가 뿌려질 때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돌이나 가시가 있기에 날마다 마음 밭을 옥토로 일구어야 한다.
빙산의 수면 위에 보이는 부분은 일부분일 뿐이고 물 밑에 있는 아래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듯이 사람의 내면에 있는 마음이 인격의 대부분을 형성한다. 신앙생활에서 마음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첫째 계명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 30)고 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마음이 없는 종교생활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셨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엄하게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마음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으로 자기의 의를 행하였다. 즉 그들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들의 마음 밭은 길가와 같이 굳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종교생활은 형식과 습관에 매여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적인 행위만을 중시한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서 영접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키워나가는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종교생활은 정죄를 통한 율법적인 관계라면 신앙생활은 용서를 통한 생명의 관계이다. 종교생활은 선악과를 선택하여 죽음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신앙생활은 생명나무를 선택하여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은혜와 진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다.
우리는 죽어 있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넘치는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이다. 그런데도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어느새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종교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내의 대부분의 어려움들은 종교인이나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들일 것이다. 에이든 토저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내면에 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면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나와 내가 보는 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동일하도록 투명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여 돌이나 가시를 걸러내어 생명의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기도
늙은 선장이었으나 그는 늘 기도하며 고래를 잡는 고래잡이 선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 대해에서 순조롭게 항해를 하던 중 갑자기 남쪽으로부터 역풍이 불어 왔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배는 남쪽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선장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나의 목적은 남쪽이 아니라 고래를 잡는 것 아닌가? 북쪽으로 가도 얼마든지 고래가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으니 북쪽으로 가자!
배는 북쪽으로 신나게 달렸고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달렸을 때, 선장과 선원들은 바다 가운데 배가 한 척이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가가 보니 14명이 기진맥진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구조를 요청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노인은 전심으로 그들을 구조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 저를 언제나 사람을 돕는 일에 써 주십시오하고 드린 기도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에 그의 영혼이 춤을 추듯 기뻐했습니다.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갈 5:16)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웰링턴\'하면 정치가나 외교사절보다 장군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려진다.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을 격파한 사령관으로 영국 국민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상습적인 탈영병 부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만 했다. 웰링턴은 일갈했다.
"나는 너를 교육도 시켜보았다. 나는 너와 상담도 해보았다. 나는 너를 처벌도 해보았다. 나는 네게 굉장히 심한 벌도 주어보았다. 그런데 너는 돌이키지 않았고 새로워지지도 않았다. 별수없이 너는 죽어야 한다." 바로 그때 장군의 부하 한 사람이 충언한다. "각하! 각하께서는 아직 이 사람에게 한 가지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놀란 장군이 묻는다. "아니 내가 아직 시도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각하, 각하께서는 이 사람을 용서해보셨습니까?"
웰링턴 장군은 고민에 잠겼다. 그 마지막 한 가지를 행해야 했다. 그 후 탈영병은 변화되었고 장군의 충성스런 부하가 되었다.
많은 의학적 통계에 따르면 인간의 질병은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생긴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 메닝거는 인간의 모든 질병의 70%는 스트레스에서 오고 스트레스의 90%는 정신적 질병 곧, 미움과 증오 그리고 용서의 결핍에서 온다고 했다. 미움과 증오, 용서의 결핍이 결국 암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치매 우울증 등의 원인이 된다. 용서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이 있다면 마음의 평안이다. 건강도 함께 따라 온다. 그래서 용서가 과거는 해결하지 못할지언정 미래는 해결해준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한번은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 충고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또한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어머니들에게도 말합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연일 무더운 날씨와 열대야로 밖에서 생활하기도 고통스러운데 그 안에서냐 오죽 하십니까? 마음도 잡아주시고 상황도 좀 좋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드립니다.
날씨도 덥지만 요사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이 나고 마음도 편치가 않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고 용납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신앙인이기에 하나님 나름데로는 뜻이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좋은 쪽으로 결발을 지을 것이란 소망 가운데 기도하면서 감당해 가고 있답니다.
베드로의 소망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기로 한 김양훈형제가 요새 바쁘고 글이 잘 쓰여지지가 않아서 이번에는 쉬게 되었답니다. 이 말을 할려고 독수리타법으로 힘들게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출소한지 이제 2달이 지나면서 현실속에서 신앙인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 김양훈형제를 위해 정말 기도 많이 하여주십시오, 얼마후 바로 여러분이 걸어야 할 길을 좀 먼저 갈 뿐입니다.
요사이 종도 분주하고 힘이든 일 때문에 몸도 무척 피곤하고 기도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한답니다. 종과 종이 섬기는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시면 담안에 있는 형제님들의 기대에 부응 할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삼복 더위에 영육간에 강건하시기를 소원합니다.
2004.07.26 박경룡목사드림
[출처] 2004/07/26 빗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지 (인천교정복지센터) |작성자 소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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