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가 만난 사람]하덕규-내 음악은 한 인간의 진실을 향한 탐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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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하는 사람들은 때로 \'\'내가 만들어낸 음악과 내 실제가 과연 일치하느냐?\'\'의 고민에 빠지곤 한다. 진정한 자아와 음악적 자신이 얼마만큼 부합하는가, 아니면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괴리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고통스런 갈등이다. 만약 아름다운 노랫말의 곡을 만들어냈는데 자신의 진면목은 추하다고 느꼈을 때, 적어도 양심을 가진 아티스트는 고뇌에 휘둘리게 된다.
\'\'80년대 아련한 감성을 전해준 전설적인 듀오 \'\'시인과 촌장\'\'의 지휘자로서, 이후에는 CCM(현대 기독교음악) 음악의 삶에 천착한 하덕규는 그러한 고민과 갈등의 진지한 뮤지션십(musicianship)에 가장 근접했던 음악작가였다.
그가 전곡을 쓴 \'\'시인과 촌장\'\'의 음악에는 비둘기로 대표된 새(bird)와 새(new)가 유난히도 많이 등장한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개죽지 위에...\'\'(\'\'사랑일기\'\'), \'\'새와 소년은 아지랑이와 함께 하늘 높이, 하늘 높이 올라가...\'\'(\'\'얼음무지개\'\') 그리고 \'\'새벽\'\', \'\'새털구름\'\', \'\'새날\'\', \'\'새봄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 등의 노래 제목들.
음악 팬들에게 드높은 서정성을 전해준 \'\'시인과 촌장\'\'의 \'\'86년 2집 앨범과 \'\'88년 3집 [숲]에 수록된 이 곡들은 순수와 아름다움 속에 새(bird)로 상징된 \'\'자유\'\'와 새(new)로 표현된 \'\'새로운 평등 세상에 대한 내적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강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더 자세히 파고들면 2집과 3집 사이에는 커다란 의식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나가지마 비둘기, 그 잿빛 날개는 너무 지쳐 있겠지만 다시 날 수 있잖아 비둘기, 처음 햇살 비추던 그날 아침처럼...\'\'(2집의 \'\'떠나가지마 비둘기\'\')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3집의 \'\'가시나무\'\')
불굴과 비상의 주문으로부터 흔들리는 자아의 고통스런 고백으로 메시지의 축이 이동한 것이다. 5월10일 늦은 밤, 서울 양재역 근처의 한 빌딩 커피숍에서 하덕규를 만나기 전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과연 당시 무슨 심경이 그를 변화시켰던 것일까.
인터뷰시간을 늦게 잡은 것은 천안대 교회실용음악학과 교수인 그의 귀경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예상보다 바쁜 모습이었다. 그는 "이제야 임진모씨와 얘기를 나누게 됐다"며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그는 질문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충실히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
얘기를 들으니 대학에서 꽤 동적(動的)인 수업활동을 해 학생들을 놀라게 한다던데...
이벤트들에 대해 들으셨군요. \'\'청소년 CCM경연대회\'\'에 이어 오는 8월에는 고교생과 재수생을 대상으로 \'\'실용음악 여름캠프\'\'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조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CCM에 대한 제 생각을 실천하는 작업들이죠. CCM이 그간 교회에 국한되어 있지만 이제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봅니다.
CCM음악이 현실과 밀착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그래요. CCM은 분명 종교음악이지만 세상의 삶과 무관한 자세로는 곤란하다는 거예요. 기독교음악도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들어가 일상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교리와 이 시대 사람들의 실존을 결합하는 것이죠. 제가 이런 저런 활동에 전력하는 것도 \'\'교회 안\'\'도 중요하지만 앞으론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고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인과 촌장\'\' 시절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시나무\'\'가 나왔을 때 전 메시지에 상당히 놀랐거든요. 앨범에도 "마지막 녹음 직전에 \'\'가시나무\'\'와 \'\'나무\'\'를 만들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란 개인노트도 들어가 있구요. 심경변화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때 얘기를 들고 싶네요.
사실 2집 곡들은 시적 감수성 속에 자유와 쟁취에 대한 신념이 녹아있지요. 하지만 3집을 만들 때는 외부상황이 바뀌었어요. 특히 \'\'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진영후보의패배와 민주화의 후퇴에 깊이 좌절했습니다. 대선 후 한 카페에서 \'\'앞으론 진보성향의 노래를 만들겠다!\'\'고 동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그리곤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간 노래를 녹음했어요. 정치권을 조소하고 비판하는 노래들이었던 거죠. 하지만 녹음을 다 마친 후 한달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상념에 휩싸였습니다. 과연 내가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막판에 들어간 \'\'가시나무\'\'가 그런 갈등의 소산이었겠네요.
그렇죠. \'\'네가 그 돌을 들어 누구를 칠 자격이 있느냐. 돌을 내려놓아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우친 거지요. 이를테면 \'\'나는 누구한테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각이었어요. 내 안의 나는 진실하지 않으며, 댄스 가수인 김완선 박남정보다 좋은 음악인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연예산업의 가면과 가수의 허위의식에 대한 스스로의 질타였습니다. 좋은 노랫말을 전달하는 \'\'포장된 나\'\'와 속으로는 영웅이 되고자 하고 세속적 성공을 바라는 \'\'진짜 나\'\'의 혼돈을 깊이 반성한 거죠. \'\'가시나무\'\'는 그런 자기고백을 담은 곡이었습니다. 급조되어 막판에 들어갔고, 그러면서 미리 녹음해놨던 공격적인 노래는 다 빼버렸습니다.
CCM으로 가는 서막이 \'\'가시나무\'\'였던 거군요.
3집은 그래서 비판적인 기조에서 갑작스레 자기 성찰적으로 전환되었지만 전 그 앨범을 끝으로 대중가요를 하지 않는다고 결심했습니다. 치부를 다 드러내고 떠난다는 심경이었지요. 참으로 음악 하는데 의기소침했고 실망했던 때였습니다. CCM이 저를 구원해주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나의 세계를 갖고 CCM은 그 세계를 전달하는 통로가 된 거죠. 거기서 궁극적 목표와 의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시나무\'\'를 쓸 때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만큼 만드는데도 시간도 많이 걸렸겠어요.
아니에요. 피아노로 음 하나 둘을 쳤는데 저절로 멜로디가 이어졌어요. 그냥 나온 멜로디였다는 게 적당할 표현일 겁니다. 피아노로 10분 만에 작곡해서 완성했어요. (잠시 말을 끊더니) 만들면서 무지 많이 울었죠. 이틀 후에 들국화 멤버로 지금은 고인이 된 허성욱에게 들려주고, 그의 피아노 연주로 녹음했지요. 성욱이가 녹음하면서 \'\'형, 이거 내 얘기 같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비판력이 거세된, 완전히 순화된 메시지라서 강한 메시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했을 테지만, 전 메시지의 솔직성 때문에 맘에 듭니다. 단순하나 탁월한 감성이라는 생각도 들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 아세요? 그런 인정을 받은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장 진실한 것이 남는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데 조성모가 \'\'가시나무\'\'를 리메이크해 빅 히트를 거두고 나서 2000년 함춘호씨와 14년 만에 다시 만나 [The Bridge]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가시나무, 두 번째 이야기\'\'란 곡이 수록되어 있구요. 당시 일각에선 조성모 인기에 편승해 \'\'시인과 촌장\'\'이 재결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강한 어조로) 그렇지 않아요. 조성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한 시점과는 무관해요. [The Bridge] 앨범 곡들은 조성모가 \'\'가시나무\'\'를 불러 히트시키기 훨씬 전에 준비한 곡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숲\'\'(3집 앨범타이틀)에서 나와 다시 \'\'숲\'\'으로 가는 메시지를 표현했을 뿐이에요. CCM을 하면서 다시 구체화된 일상을 지향했고 그래서 다시 한번 앨범을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조성모의 히트가 터졌던 것이죠. 물론 레코드사가 그런 시점을 이용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전 조성모에 편승했다는 외부의 시선에 상관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그 상황은 떠난 사람 아닌가요?
\'\'58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하덕규는 추계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다가 오종수와 만나 시인과 촌장을 결성, \'\'81년 첫 앨범을 발표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시작했다는 그는 이 앨범을 \'\'지금 생각해도 허영으로 가득 찬 결과물\'\'이었다고 술회한다. 앨범 실패로 낙담한 그는 우연히 본 미국 포크의 전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의 흑백다큐멘터리 영화에 일대 충격을 받아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 그가 거스리에 영향받아 삼게 된 지향은 \'\'예술가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 아래 확립된 운동가적 삶이었다. \'\'86년 빼어난 어쿠스틱 기타리스트 함춘호(\'\'61년생)와 의기투합해 발표한 시인과 촌장 2집 앨범은 그를 일약 언더의 주요한 작가로 상승시킨 작품이었다. 지금도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애청곡 \'\'사랑일기\'\'를 비롯해 \'\'푸른 돛\'\', \'\'고양이\'\', \'\'풍경\'\' 그리고 \'\'비둘기\'\' 노래가 연작 형식으로 수록된 이 앨범은 \'\'80년대 포크의 수작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함춘호와의 공동전선은 거기서 끝났고 \'\'88년의 3집 [숲]은 당시 듀엣 \'\'어떤 날\'\'의 멤버인 조동익, 이병우와 꾸려냈다. 조성모에 의해 위력이 재생산된 그의 대표작 \'\'가시나무\'\'가 바로 이 앨범의 수록곡. 이 곡 외에도 앨범에서는 \'\'새벽\'\', \'\'푸른 애벌레의 꿈\'\', \'\'새날\'\' 등이 라디오전파를 수놓았다.
그 전인 \'\'84년 \'\'진달래\'\'가 수록된 개인 앨범을 발표한 바 있는 그는 시인과 촌장 이후에는 CCM으로 전향해 \'\'90년 [쉼], \'\'92년 [광야], \'\'97년 [집1] 등 지속적인 앨범 활동을 펼쳤다. [쉼]에 수록된 곡 \'\'자유\'\'는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2000년에는 [The Bridge]로 신앙 아닌 현실세계로 돌아왔지만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가장 최근 작품은 정종원, 한웅재, 유지연과 함께 만든 2001년 [The Painter] 앨범이다. 그는 시인과 촌장 이후 "음악을 통해 폼 잡으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자기부패와의 사슬을 끊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하덕규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인 함춘호씨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없었다면 2집 앨범은 안 됐을 겁니다. 그의 기타가 빛나는 앨범이죠. 전 그때 제 노래를 연주와 편곡으로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가 대구에서 음악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대구로 내려가 듀엣을 하자고 제의해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당시 제가 아파했던 기억들, 괴로움들 그리고 춘호의 기타는 아련한 향수를 전해주지요.
그런데 왜 3집은 같이 작업하지 못한 거죠?
춘호는 당시 자유롭기를 원했어요. 막 결혼도 했고. 역할 분담을 했어야 했는데, 지향의 차이가 나타났죠. 가고자 하는 길이 서로 달랐습니다.
\'\'91년에 라디오에 많이 나왔던 노래 \'\'자유\'\'는 기조가 특이했습니다.
로큰롤이었죠. \'\'91년 TV [가요 톱 10] 10위권에 들어갔지만, 내 노래가 아닌 것 같아서 싫어했어요. 미국에서 녹음한 곡이었는데 나중 빼려고 했었죠. 더 진지해졌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가장 영향을 준 뮤지션은 누군가요?
우디 거스리구요. 조동진과 김민기의 영향도 컸죠. 닐 영(Neil Young)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의 \'\'79년 앨범 [Rust Never Sleeps]를 들으면 \'\'90년대 록의 문법인 그런지(grunge)에 그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그가 있었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의 \'\'71년 [4 Way Street] 앨범도 많이 들었죠.
굳이 시인과 촌장 시절과 그 음악을 규정한다면?
시적 감수성이라는 제 강점을 잘 표출했다고 봅니다. 제 음악은 시를 노래하려고 했던 것이었죠. 좋은 뮤지션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한 인간의 진실을 향한 탐색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oimusic 2004년 06월호 임진모
\'\'80년대 아련한 감성을 전해준 전설적인 듀오 \'\'시인과 촌장\'\'의 지휘자로서, 이후에는 CCM(현대 기독교음악) 음악의 삶에 천착한 하덕규는 그러한 고민과 갈등의 진지한 뮤지션십(musicianship)에 가장 근접했던 음악작가였다.
그가 전곡을 쓴 \'\'시인과 촌장\'\'의 음악에는 비둘기로 대표된 새(bird)와 새(new)가 유난히도 많이 등장한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개죽지 위에...\'\'(\'\'사랑일기\'\'), \'\'새와 소년은 아지랑이와 함께 하늘 높이, 하늘 높이 올라가...\'\'(\'\'얼음무지개\'\') 그리고 \'\'새벽\'\', \'\'새털구름\'\', \'\'새날\'\', \'\'새봄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 등의 노래 제목들.
음악 팬들에게 드높은 서정성을 전해준 \'\'시인과 촌장\'\'의 \'\'86년 2집 앨범과 \'\'88년 3집 [숲]에 수록된 이 곡들은 순수와 아름다움 속에 새(bird)로 상징된 \'\'자유\'\'와 새(new)로 표현된 \'\'새로운 평등 세상에 대한 내적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강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더 자세히 파고들면 2집과 3집 사이에는 커다란 의식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떠나가지마 비둘기, 그 잿빛 날개는 너무 지쳐 있겠지만 다시 날 수 있잖아 비둘기, 처음 햇살 비추던 그날 아침처럼...\'\'(2집의 \'\'떠나가지마 비둘기\'\')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3집의 \'\'가시나무\'\')
불굴과 비상의 주문으로부터 흔들리는 자아의 고통스런 고백으로 메시지의 축이 이동한 것이다. 5월10일 늦은 밤, 서울 양재역 근처의 한 빌딩 커피숍에서 하덕규를 만나기 전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과연 당시 무슨 심경이 그를 변화시켰던 것일까.
인터뷰시간을 늦게 잡은 것은 천안대 교회실용음악학과 교수인 그의 귀경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예상보다 바쁜 모습이었다. 그는 "이제야 임진모씨와 얘기를 나누게 됐다"며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그는 질문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충실히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
얘기를 들으니 대학에서 꽤 동적(動的)인 수업활동을 해 학생들을 놀라게 한다던데...
이벤트들에 대해 들으셨군요. \'\'청소년 CCM경연대회\'\'에 이어 오는 8월에는 고교생과 재수생을 대상으로 \'\'실용음악 여름캠프\'\'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조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CCM에 대한 제 생각을 실천하는 작업들이죠. CCM이 그간 교회에 국한되어 있지만 이제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봅니다.
CCM음악이 현실과 밀착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그래요. CCM은 분명 종교음악이지만 세상의 삶과 무관한 자세로는 곤란하다는 거예요. 기독교음악도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들어가 일상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교리와 이 시대 사람들의 실존을 결합하는 것이죠. 제가 이런 저런 활동에 전력하는 것도 \'\'교회 안\'\'도 중요하지만 앞으론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고와 관련이 있습니다.
\'\'시인과 촌장\'\' 시절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시나무\'\'가 나왔을 때 전 메시지에 상당히 놀랐거든요. 앨범에도 "마지막 녹음 직전에 \'\'가시나무\'\'와 \'\'나무\'\'를 만들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란 개인노트도 들어가 있구요. 심경변화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때 얘기를 들고 싶네요.
사실 2집 곡들은 시적 감수성 속에 자유와 쟁취에 대한 신념이 녹아있지요. 하지만 3집을 만들 때는 외부상황이 바뀌었어요. 특히 \'\'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진영후보의패배와 민주화의 후퇴에 깊이 좌절했습니다. 대선 후 한 카페에서 \'\'앞으론 진보성향의 노래를 만들겠다!\'\'고 동료들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그리곤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간 노래를 녹음했어요. 정치권을 조소하고 비판하는 노래들이었던 거죠. 하지만 녹음을 다 마친 후 한달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상념에 휩싸였습니다. 과연 내가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막판에 들어간 \'\'가시나무\'\'가 그런 갈등의 소산이었겠네요.
그렇죠. \'\'네가 그 돌을 들어 누구를 칠 자격이 있느냐. 돌을 내려놓아라.\'\'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우친 거지요. 이를테면 \'\'나는 누구한테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각이었어요. 내 안의 나는 진실하지 않으며, 댄스 가수인 김완선 박남정보다 좋은 음악인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연예산업의 가면과 가수의 허위의식에 대한 스스로의 질타였습니다. 좋은 노랫말을 전달하는 \'\'포장된 나\'\'와 속으로는 영웅이 되고자 하고 세속적 성공을 바라는 \'\'진짜 나\'\'의 혼돈을 깊이 반성한 거죠. \'\'가시나무\'\'는 그런 자기고백을 담은 곡이었습니다. 급조되어 막판에 들어갔고, 그러면서 미리 녹음해놨던 공격적인 노래는 다 빼버렸습니다.
CCM으로 가는 서막이 \'\'가시나무\'\'였던 거군요.
3집은 그래서 비판적인 기조에서 갑작스레 자기 성찰적으로 전환되었지만 전 그 앨범을 끝으로 대중가요를 하지 않는다고 결심했습니다. 치부를 다 드러내고 떠난다는 심경이었지요. 참으로 음악 하는데 의기소침했고 실망했던 때였습니다. CCM이 저를 구원해주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나의 세계를 갖고 CCM은 그 세계를 전달하는 통로가 된 거죠. 거기서 궁극적 목표와 의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시나무\'\'를 쓸 때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만큼 만드는데도 시간도 많이 걸렸겠어요.
아니에요. 피아노로 음 하나 둘을 쳤는데 저절로 멜로디가 이어졌어요. 그냥 나온 멜로디였다는 게 적당할 표현일 겁니다. 피아노로 10분 만에 작곡해서 완성했어요. (잠시 말을 끊더니) 만들면서 무지 많이 울었죠. 이틀 후에 들국화 멤버로 지금은 고인이 된 허성욱에게 들려주고, 그의 피아노 연주로 녹음했지요. 성욱이가 녹음하면서 \'\'형, 이거 내 얘기 같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그 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비판력이 거세된, 완전히 순화된 메시지라서 강한 메시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했을 테지만, 전 메시지의 솔직성 때문에 맘에 듭니다. 단순하나 탁월한 감성이라는 생각도 들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것 아세요? 그런 인정을 받은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장 진실한 것이 남는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데 조성모가 \'\'가시나무\'\'를 리메이크해 빅 히트를 거두고 나서 2000년 함춘호씨와 14년 만에 다시 만나 [The Bridge]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는 \'\'가시나무, 두 번째 이야기\'\'란 곡이 수록되어 있구요. 당시 일각에선 조성모 인기에 편승해 \'\'시인과 촌장\'\'이 재결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강한 어조로) 그렇지 않아요. 조성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한 시점과는 무관해요. [The Bridge] 앨범 곡들은 조성모가 \'\'가시나무\'\'를 불러 히트시키기 훨씬 전에 준비한 곡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숲\'\'(3집 앨범타이틀)에서 나와 다시 \'\'숲\'\'으로 가는 메시지를 표현했을 뿐이에요. CCM을 하면서 다시 구체화된 일상을 지향했고 그래서 다시 한번 앨범을 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조성모의 히트가 터졌던 것이죠. 물론 레코드사가 그런 시점을 이용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전 조성모에 편승했다는 외부의 시선에 상관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그 상황은 떠난 사람 아닌가요?
\'\'58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하덕규는 추계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다가 오종수와 만나 시인과 촌장을 결성, \'\'81년 첫 앨범을 발표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시작했다는 그는 이 앨범을 \'\'지금 생각해도 허영으로 가득 찬 결과물\'\'이었다고 술회한다. 앨범 실패로 낙담한 그는 우연히 본 미국 포크의 전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의 흑백다큐멘터리 영화에 일대 충격을 받아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로 들어서게 된다.
당시 그가 거스리에 영향받아 삼게 된 지향은 \'\'예술가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고 아래 확립된 운동가적 삶이었다. \'\'86년 빼어난 어쿠스틱 기타리스트 함춘호(\'\'61년생)와 의기투합해 발표한 시인과 촌장 2집 앨범은 그를 일약 언더의 주요한 작가로 상승시킨 작품이었다. 지금도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애청곡 \'\'사랑일기\'\'를 비롯해 \'\'푸른 돛\'\', \'\'고양이\'\', \'\'풍경\'\' 그리고 \'\'비둘기\'\' 노래가 연작 형식으로 수록된 이 앨범은 \'\'80년대 포크의 수작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함춘호와의 공동전선은 거기서 끝났고 \'\'88년의 3집 [숲]은 당시 듀엣 \'\'어떤 날\'\'의 멤버인 조동익, 이병우와 꾸려냈다. 조성모에 의해 위력이 재생산된 그의 대표작 \'\'가시나무\'\'가 바로 이 앨범의 수록곡. 이 곡 외에도 앨범에서는 \'\'새벽\'\', \'\'푸른 애벌레의 꿈\'\', \'\'새날\'\' 등이 라디오전파를 수놓았다.
그 전인 \'\'84년 \'\'진달래\'\'가 수록된 개인 앨범을 발표한 바 있는 그는 시인과 촌장 이후에는 CCM으로 전향해 \'\'90년 [쉼], \'\'92년 [광야], \'\'97년 [집1] 등 지속적인 앨범 활동을 펼쳤다. [쉼]에 수록된 곡 \'\'자유\'\'는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2000년에는 [The Bridge]로 신앙 아닌 현실세계로 돌아왔지만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가장 최근 작품은 정종원, 한웅재, 유지연과 함께 만든 2001년 [The Painter] 앨범이다. 그는 시인과 촌장 이후 "음악을 통해 폼 잡으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자기부패와의 사슬을 끊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하덕규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인 함춘호씨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없었다면 2집 앨범은 안 됐을 겁니다. 그의 기타가 빛나는 앨범이죠. 전 그때 제 노래를 연주와 편곡으로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가 대구에서 음악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대구로 내려가 듀엣을 하자고 제의해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당시 제가 아파했던 기억들, 괴로움들 그리고 춘호의 기타는 아련한 향수를 전해주지요.
그런데 왜 3집은 같이 작업하지 못한 거죠?
춘호는 당시 자유롭기를 원했어요. 막 결혼도 했고. 역할 분담을 했어야 했는데, 지향의 차이가 나타났죠. 가고자 하는 길이 서로 달랐습니다.
\'\'91년에 라디오에 많이 나왔던 노래 \'\'자유\'\'는 기조가 특이했습니다.
로큰롤이었죠. \'\'91년 TV [가요 톱 10] 10위권에 들어갔지만, 내 노래가 아닌 것 같아서 싫어했어요. 미국에서 녹음한 곡이었는데 나중 빼려고 했었죠. 더 진지해졌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가장 영향을 준 뮤지션은 누군가요?
우디 거스리구요. 조동진과 김민기의 영향도 컸죠. 닐 영(Neil Young)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의 \'\'79년 앨범 [Rust Never Sleeps]를 들으면 \'\'90년대 록의 문법인 그런지(grunge)에 그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그가 있었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의 \'\'71년 [4 Way Street] 앨범도 많이 들었죠.
굳이 시인과 촌장 시절과 그 음악을 규정한다면?
시적 감수성이라는 제 강점을 잘 표출했다고 봅니다. 제 음악은 시를 노래하려고 했던 것이었죠. 좋은 뮤지션을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한 인간의 진실을 향한 탐색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oimusic 2004년 06월호 임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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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덕규님을 모시고 우리교회에서 콘서트를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