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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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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재호
댓글 2건 조회 1,107회 작성일 04-12-05 2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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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교회의 뒷마당 구석에 버려진 시멘트 십자가였습니다.

꽤 오랜 시간 나는 예배당 꼭대기에서 작은 시골마을을 바라보며 서 있었답니다. 높은 곳에 있다보니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일들을 볼 수 있었죠. 마음 아픈 일도 있었고, 행복한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뒷마당 벽에 기대어 담쟁이덩굴들과 함께 뒤엉켜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렇게 그늘진 곳, 보이지 않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인 것 같아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빛이 되지 못한 채 전기세만 축내는 네온사인 십자가에 최고급 목재로 만든 화려한 십자가들이 판을 친다고 합니다. 그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시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하나의 장식품으로 전락해 버려 손가락질 당하는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닌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예수라는 사나이가 산헤드린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후 골고다언덕까지 채찍질을 당하며 지고 가야 했던 십자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예수의 절규를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던 십자가, 예수의 고난의 정점에서 함께 체온을 나눴던 십자가였으니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내가 가장 어울리는 자리는 사실 예수라는 사나이가 걸어갔던 그 자리,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소외된 자들, 절망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앞세워 자기의 욕심을 세우는 이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군전쟁도 그랬고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도 십자가를 앞세워 민중들, 인디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은 나를 앞세워 사탕발림을 해가며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결국 나의 본모습은 퇴색해 버려 그 십자가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답니다. 내가 나에게서 소외된 것이죠.



작은 시골교회의 예배당 꼭대기에서 거반 스무 해를 채워가고 있을 때 내 몸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이제 그만 내 삶을 놓아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했던 어느 날 거대한 포크레인이 와서는 나를 뽑아 올렸고, 내가 있던 자리에 철탑이 올라가고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가 우뚝 세워졌습니다.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야, 이젠 네가 내가 했던 일을 해줘야겠다."



그러나 너무도 잘난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목사님, 이 뽑은 십자가를 갖다 버릴까요?"



이렇게 쓰레기더미에 버려지는 것이구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아니에요. 저 쪽 잘 보이는 곳에 놓아주세요. 우리 교회 첫 십자가인데 그걸 어떻게 버려요."



그래서 잘 보이는 곳에 놓여졌는데 보는 교인들마다 교회마당에 무덤이 있는 것 같다면서 구석으로 치워버리라고들 했습니다. 결국 나는 잘 보이지 않는 후미진 구석에 놓여지게 되었답니다.



맨 처음에는 얼마나 서럽고 슬펐는지 모릅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화려한 빛을 발하며 서 있는 네온사인 십자가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며칠 뒤 목사님이 내 곁에 담쟁이덩굴을 심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들아, 잘 자라서 십자가 춥지 않게 해 주렴. 십자가야,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제 편안하게 이 곳에서 쉬렴. 언젠가는 담쟁이덩굴들이 너를 꼭 안아 줄 거야. 그리고 슬퍼하지 마라. 이 곳에 있어도 너는 나에겐 소중한 십자가란다."



아직 버림받은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니 기쁘기도 했지만 이렇게 후미진 곳,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했습니다. 그리고 저 담쟁이덩굴이 내 몸을 온전히 껴안아 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술에 잔뜩 취한 행인이 교회에 들어와 한참 푸념을 하더니만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어허, 이 곳에 거룩한 십자가가 있네."



그는 나를 향해 서더니 그 더러운 오줌을 인정사정없이 내 몸에 뿌리고는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갔습니다. 아, 그 알코올에 찌든 오줌냄새로 목욕한 내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빴습니다.



"하나님,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후미진 곳에 버려진 것도 모자라서 저런 인간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다뇨?"

"애야, 예수는 그보다 심한 모욕도 받았단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그건 이미 이천 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잖아요."

"아니야, 지금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단다."

"지금도요?"

"그래, 그 옛날 그랬듯이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못 박히고 있단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요?"

"그래…."



여름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담쟁이덩굴 하나가 슬며시 내 몸에 기대며 말했습니다.



"너에게 기대도 되겠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직도 내가 누군가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고마워. 지금은 이렇게 기대어 있지만 언젠가는 너를 꼭 안아 줄게."



그리고 몇 해가 지나 담쟁이덩굴은 내 온 몸을 껴안았고 내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이죠. 담쟁이덩굴의 자란 모습에는 희미하게 십자가의 흔적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어렴풋 깨달았습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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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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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자신이  용도폐기된 버려진 십자가 같아 외로움을 앓을때도 종종있습니다,나이좀 먹었다고,지식이 좀 떨어진다고,돈좀 없다고,때로는 불평을 해대며,자신을 버려둔 상대를 원망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주님은 어깨를 내어주며 우리에게 "기대고 쉬어라," 네가 지금 모두에게 배반을 당하고 아파하지만 그러나 너의 십자가는 내 가슴에 영원히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단다."온 몸으로 말씀하십니다."힘을 냅시다.용기를 잃지 맙시다.예수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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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댓글

작성일

나는 요 몇일 마음과 육신이 몹시 피곤하고 지쳐 있었습니다.장로라는 직분이 참 싫어 졌습니다.용도 폐기된 십자가같이 참담한 기분이였습니다.존경과 사랑은 고사하고 비판과 손가락질 대상이라면 누가 이런 누더기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까.그러다 골고다의 주님을 발견한것입니다.그토록 사랑하던 제자들마져 모두 배반하고 도망가버린 ,육신의 고통으로 엘리엘리 라마사막다니를 외치시던 그 메마른 입술을,그러다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밖고 조롱하던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던 주님의 사랑을,아 아 그거였습니다.내가 부족했습니다.죄송합니다.용서를 바랍니다.버려저도 그냥 십자가로 서 있겠습니다.행복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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