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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전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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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1,192회 작성일 06-07-18 01:25

본문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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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_blB.gif선바위
?kid0105_sun.jpg당말 뒷산 노적봉에는 선바위가 있다. 이 선바위는 모양이 아름답고 서 있는 형태라 선바위라고 이름지어져 있었다. 이 선바위에 대한 전설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구 전 도중에 두 가지 내용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전해지고 있었으나 이 선바위에 대한 전설들의 공통점은 소금과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옛날 마을(당말)에 소금장수가 살았는데 인천에서 소금을 사와 팔았다.
그런데 한번 은 소금장수가 인천 소금상인이 구두쇠처럼 소금값을 짜게 굴어 골탕을 먹이기로 작 정하고, 자신의 이름을 오산의 선바위라고 말하며 소금세배를 사가면서 대금은 다음 에 주기로 약속하고 오산으로 와서 대금을 보내지 않았다.

인천의 구두쇠 상인은 외 상값을 가져올 것을 기다리다 지쳐 화가 나서 오산까지 찾아와 선바위를 찾게 되었다.
길을 찾아 선바위를 물으니, 마을사람들은 선바위는 마을 뒷산에 있는 커다란 바 위라고 대답했다.
이에 돈을 받으로 온 상인 영감이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산에 솟아있는 선바위만 쳐다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 선바위는 소금 세배를 삼킨 바위로 이름이 났다고 전한다.
또 하나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는 마을에 홍수가 나 잠겼을 때, 소금 장수들이 산 정상의 선바위 뒤에 소금을 쌓아 숨겨놓았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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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_blB.gif내삼미의 전설
?kid0105_ne.jpg조선시대 영조 말엽에 정조대왕이 왕위에 올라 효를 다하기 위해서 양주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을 태안 안녕리 화산으로 능을 이장시키고 또한 능을 가까이서 참배하고자 도성(都城)을 수원으로 이전하여 천도하려 하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능행차만 자주 다니셨다.

어느날 능행차 도중 정조대왕은 수원 유수를 불러, 이곳 고을의 이름을 물으셔서 "문시백(文市百) 송산림(松山林)" 이라고 아뢰니 정조대왕은 "문(文)에는 필(筆)이 있는 법이니, 필봉이라 고치라"고 하였다.

또 다시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실 때에 다시 수원유수에게 고을 이름을 물어 "문시백 필봉동"이라 하니, 왕께서 이곳 사면 주위를 관망하시고는 송산골은 금로대송(錦老大 松)이 울창하고 아름다우며, 점이골(죽미령)은 대나무가 아름다우며, 문시와 오미의 오동나무가 아름답다하여 이곳을 삼미(三美)라 칭하셔서 이곳의 지명이 삼미가 되었 다고 한다.

그러나 삼미라 청하여 오던 중, 일제시대에 이르러 경부선 철도와 도로가 횡단됨으 로써 반월봉을 능선으로 하여 외삼미와 내삼미가 분리되고, 또 내삼미리에서 수청리 가 분리되고 또 다시 철로를 경계로 내삼미리가 1리와 2리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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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_blB.gif금암동 애기바위
?kid0105_baby1.jpg금암동은 예로부터 물이 많은 동네로 돌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서 가슴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산꼭대기의 애기바위는 듣는 사람들을 안타 깝게 한다.

금암동의 서북쪽 산꼭대기에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칼로 잘려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런 모양새를 갖게 된 다음과 같은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조 25년 조선은 당파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침략으로 수도 한양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팔도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왜구들은 명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약탈지에 대한 노략질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어느 날 왜군을 이끌고 온 장수가 노략질을 위해 금바위골(금암동)에 들어와 금바위 골의 지세를 보고, 앞으로 범상치 않을 인물이 태어날 예감에 위협을 느낀 왜장은 부하들을 시켜 금바위골에서 조곶이(지곶동)로 넘어가는 고개에 길을 내어 산의 기 운을 끊어 놓고, 모든 젊은 남자와 아이들까지 몰살시키고 말았다.

한편, 남편을 왜군의 손에 잃은 젊은 아낙이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는 이상하게 양쪽 어깨죽지 밑에 새의 깃과 같은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것을 본 젊은 아낙은 아 기가 커서 백성들의 장수가 될 것이라 믿고 아기의 출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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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_blB.gif운암들의 전설
?kid0105_un.jpg아주 오랜 옛날, 오산천에 제방이 없어 장마만 지면 물이 범람하여 농사에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제방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어 느 몸집 큰 과객이 금암리 어느 진사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게 되어 며칠동안을 무 위도식하며 지내다 신세갚음으로 오산천의 제방천을 쌓아 줄테니 큰 가래 하나와 통 돼지 일곱 마리와 술 일곱동이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진사는 어이가 없었으나 과 객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수원에서 큰가래삽과 물프레 나무를 베어 오산으로 왔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과객이 하루종일 낮잠을 자고는 저녁에 일어나 일을 시 작하였는데 과객은 큰 가래를 한 손으로 들고 개천의 흙과 모래를 떠서는 왼쪽에 쌓 고 또 떠서는 오른쪽에 쌓으면서 통돼지와 술을 먹고 일을 계속하니 순식간에 오산천 제방이 만들어졌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길을 떠났고 과객의 이름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객이 오산을 떠나 화성군 동탄면 미륵뎅이를 지나 영천리를 가다 길 가운데 과객을 가로막는 나무 두 그루를 뿌래째 뽑아놓고 운암발목(雲岩拔 木)이라 써놓아 주민들이 그제서야 그 과객의 이름이 운암인줄 알게 되었고, 그에 대 한 고마운 마음에 그때부터 오산천변의 들을 "운암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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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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