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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 \"전 개성도 없고 노래도 잘 못해요\"-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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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1,887회 작성일 07-03-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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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5일 (목) 17:06 ? 연합뉴스


윤복희 "전 개성도 없고 노래도 잘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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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만에 오빠 윤항기와 한 무대 올라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우리가 다시 무대에 함께 서는 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귀한 무대입니다."

윤항기(64)ㆍ윤복희(61) 남매가 4월17일 오후 8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CBS 부활절 음악회-윤항기 윤복희의 여러분\'이란 타이틀로 함께 노래한다. 남매는 가수 남진과 함께 1977~78년 극장식 공연장을 돌며 리사이틀을 펼친 적은 있지만 둘만의 대등한 합동 공연을 펼치는 건 처음이다.

15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마련한 남매는 시종일관 서로를 치켜세우며 우애를 과시했다.

가수 겸 연주자, 작곡가에서 90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성직자로 변신한 윤항기는 "윤복희는 동생이기 전에 내 인생에서 귀한 삶의 목표를 제시해준 사람"이라며 "윤복희가 없었으면 나에겐 대중스타, 목사란 자리도 없었다. 남매이기 이전에 스승이고 대선배"라고 말했다.

이에 화답하듯 윤복희는 "내 노래를 돈 주고 들을 만큼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 안한다"며 "오빠가 노래를 더 잘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난 개성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다. 집에서 찌개 끓이고 청소ㆍ빨래하고, 요즘도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윤복희는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갑자기 스타가 된 것 같다"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윤항기-복희 남매와의 일문일답.

--30여 년 만에 남매가 한 무대에 서는 소감은.

▲76년 미국에서 귀국해 77~78년 오빠와 극장에서 공연한 적은 있다. 만약 이번 공연이 돈과 명예를 위한 콘서트였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대 생활이 55~56년쯤 된다. 한결같이 걱정하고 서포트해준 여러분에게 감사하단 얘기를 직접 하고 싶어 결심했다. 너무나 좋다.(윤복희)

▲재작년 11월 기아대책본부 주최로 어린이대공원 돔아트홀에서 음악인생 데뷔 45주년 자선 공연을 성대하게 치렀다. 동생과 서로의 공연에 게스트로 선 적은 있지만 둘이 동등한 위치에서 합동 공연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더욱 기쁘다.(윤항기)

--부제가 \'부활절 음악회\'인데 어떤 무대로 꾸미나.

▲이번 공연 타이틀은 \'윤항기 윤복희의 여러분\'이다. 오빠는 목사, 난 권사다. 주님이 우리를 안 잡아줬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혼 등으로) 힘들 때 하나님에게서 위로받은 곡인 \'여러분\'(윤항기 작사ㆍ작곡으로 기독교적인 복음 메시지를 가사에 담았다)이란 곡 자체가 간증이다. 이 노래뿐 아니라 가스펠 메들리를 선보이고 오빠가 작사하고 김정택 오케스트라 단장이 작곡한 신곡 \'아임 더 웨이(I\'m the Way)\'도 선보인다. 그러나 크리스천 관객만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 아니다.(윤복희)

--남매의 우애가 궁금하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10대 전에 한 지붕에서 자란 시간이 거의 없다. 오빠는 보이스카우트에도 나를 데려가 칼던지기, 딱지와 구슬치기를 시켰다. 불행히도 한번도 고무줄 놀이를 해본 적이 없다. 또 난 미국으로 가 뮤지컬을 해 항상 오빠에게 미안했다. 난 어려서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오빠는 그걸 알기 때문에 외로워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오빠가 어린 시절부터 뛰쳐나가 고생을 사서했다. 다리 밑에서 깡통 들고 거지 노릇도 해보고, 파출소 앞에서 구두닦이 일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오빠가 연예계에 못 들어오도록 막았다. 내가 고생해도 오빠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후회된다. 미안한 마음에 76년 귀국해 오빠와 극장식 공연을 한 것이다.(윤복희)

▲부모님이 남기고 간 재산이 없어 어린 시절 불행했다. 또 부모님 생전에는 유랑극단처럼 공연을 해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드물었다. 동생은 6살 때 부친(코미디언인 아버지 윤부길 씨)의 무대에도 출연했다. 부친은 반대로 난 공연장에 못 오도록 막았다. 동생만 예뻐한다고 생각해 반항심에 뛰쳐나간 것 같다. 그 피가 어디 가겠나.(윤항기)

▲당시 내가 부친에게 무대에 안 세워주면 자살하겠다고 했다(웃음).(윤복희)

▲동생은 자신에게 타협을 안한다. 대통령이 와도 못 말린다.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말릴 수 있다(웃음).(윤항기)

--윤항기 씨는 밴드(키보이스)에서 솔로 가수로 나서 활약하다가 80년대 이후에는 근황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80년대 말까지 방송 활동을 했다. 87년 신학 공부를 하게 됐다. 가수로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음반을 낸건 86년 아시안게임 때다. \'웰컴 투 코리아(Welcome to Korea)\'란 노래를 타이틀로 한 음반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이듬해까지 방송에 출연했지만 90년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 안수를 받았고 이후 목회자(예음음악신학교 총장이며 예음교회 담임목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윤복희 씨는 그간 뮤지컬 무대에만 전념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70년대 성경을 공부할 때 하나님이 뮤지컬을 하라고 하셨다. 지금은 하나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다.(윤복희)

--최근 뮤지컬 붐인데 \'뮤지컬계의 대모\'로서 뿌듯할 것 같다.

▲처음 \'빠담빠담빠담\' 출연할 때 10원 한장 안 받고 내 차에 기름 넣어준다는 조건 하에 출연했다. 30년이 넘도록 기름값을 못 받았다(웃음). 뮤지컬 \'캣츠\' 때도 내 집이 은행이 들어갔다 나온 게 여러 번이다. 요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을 하고 좋은 대우를 받을 때 이래도 되는 건가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윤복희)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지금이다. 오빠와 동등하게 앉아 여러분과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언제 이런 자리가 또 있을지 기약할 수 없지 않나. 나에겐 정말 소중한 순간이다.(윤복희)

mim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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