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기 싫은 77가지 이유
저자:이만재
책머리에 나는 찐빵 대소동으로 인해 방송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얻은 교계정보가 많았는데 그중 특히 ‘19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비롯된 전반적인 교세성장의 둔화 현상’이었다. 그리고 교세 성장의 둔화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초신자 신규 영입 증가율의 감소와 신세대 청년층의 잇단 교회 이탈현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민일보 부설 교회성장연구소의 한 통계자료를 보면 교세 성장의 연평균 증가율을 따졌을 때 60년 대에 41.2%, 70년대에 12.5%, 80년대에 4.4%, 그리고 90년대 이후에는 불과 3% 미만 내지는 -1%로 나타나 있다. 줄어든 주요 원인은 우리 교회가 다원화, 정보화, 도시화, 민주화, 세계화로 치닫는 시대적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미처 따라가 주지 못한 데서 온 결과로 지적되고 있다.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그 좋은 하나님 사랑 얘기를 해주자면, 그러자면 우선 내 자신이 신세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순서였다. 저들의 의식성향을 알아야 하고, 저들이 행동양태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저들이 왜 교회를 멀리 하려 하고, 왜 교회를 떠나려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다행이 내 주변에는 신세대 젊은이들이 많다. 이들을 참고로 이책을 쓰게 되었다.
오랜 기도와 숙고 끝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 세세한 사연들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이 책 내용 각 항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실재하는 현상을 그냥 묻어두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나름의 판단, 그리고 누군가는 일대일로 맞서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풀긴 풀어야 된다는 나름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 ‘사명’을 왜 반드시 내가 져야 되는가에 대한 회의도 없지 않았지만, 나는 기신자보다는 비신자와 초신자에 대해 관심이 더 많다. 나 자신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비신자였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내 따끈하고 치열한 ‘초신자’의 삶으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소망이 바로 내가 가진 사명의 자격 전부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느끼겠지만 자칫 정형화되기 쉬운 교회식 논리나 율법처럼 들리기 시운 성경적 어법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디 뜻과 섭리를 보다 쉬운 생활언어와 피부언어로 바꿔서 닫힌 마음의 저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면서 아프고 뜨겁고 곤혹스러운 화두들 앞에 조심조심 접근하곤 했다.
저자 이만재 카피라이터이며, 칼럼니스트이다. 서울카피라이터즈 클럽 회장 2회역임을 하고, 한국 수필가협회 회원이며, 조선일보광고대상, 경향신문광고대상 심사위원, 40대 후반에 늦깍이로 예수님을 영접, 기독교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된 <막쪄낸 찐방>,<세상 속의 찐빵>의 저자이며, [카피파워]대표이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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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1. 노방전도 모습 보면 만정이 딱 떨어진다
지하철역 같은 곳에서 큰소리로 “예수구원”, “천국구원” 등을 외치는 이들을 자주 본다. 이상스런 각설이 복장에 화가 난 흉한 얼굴로 “말세!”, “종말!”을 외치는 사람도 보았다. 예수 믿으면 나도 저렇게 될까봐, 또는 남들이 저 비슷한 부류로 취급할까봐 아예 교회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찐빵의 생각 신앙의 속성이 원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도 어떤 이는 묵상하기를 즐기고, 또 어떤 이들은 통성하기도하기를 즐기지 않습니까?
또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가 세상 만인들한테 당장 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예수님의 재림 임박을 간절히 믿는 경우도 있겠지요.
다행한 것은 이제 날이 갈수록 그런 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며, 또 이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도 그런 방식의 노방전도는 별반 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귀뜀을 하자면 이상스런 언동으로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일부는 정통 기독교단 소속이 아닌 사이비 교파 사람들도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런 사소한 이유로 해서 젊은이가 교회를 멀리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젊은이의 냉철한 이성과 지성을 의심할 만한 일도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종교의 모습 가운데 99.9%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건하며 진실된 정황이 아닙니다. 0.1%의 상한 기분 때문에 99.9%나 되는 ‘생명의 보물’을 포기하는 미욱한 젊은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참모습은 거리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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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어 교회 못 가
?나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솔직히 주중보다 주말이 더 바쁘다. 듣기로는 한 번 교회에 나가기 시작할 경우 교회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준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부담이 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과 아울러 내 마음 자체에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찐빵의 생각 그러나 사실은 시간적 여유나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직한 대답이 아닐까요? 교회생활에 충실한 신자들은 어떻게 시간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젊은이의 경우와 신자들의 경우가 다른 것은 시간 배분의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월요일을 한 주일의 시작으로 치고 주말을 한 주일의 끝으로 칩니다만 교인들은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작으로 칩니다. 일주일의 첫째날을 주님께 바치고 나서 그 다음 월요일부터 제 생업에 착수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바로 ‘생각’의 차이가 있고 ‘필요성’의 여부가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제 할일을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그냥 교양 삼아 가는 곳이 아니라 한 주일치 자신의 올바른 삶을 위해 말씀의 생명력과 보혈처럼 귀한 성령을 내 영혼 안에 충전받기 위해 가는 곳이라고 한번 ‘생각’을 바꿔보시지요.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면 자연히 ‘필요’의 가장 절실한 우선순위에 교회가 등장할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일생은 곧 시간의 승부다.’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시간 사용을 자기중심적으로 철저히 효율화함으로써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거칠고 각박한 세상을 쉰 해 정도 치열하게 살아본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일생은 세상적인 시간 효율 가동량의 과소 여부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삶의 질, 시간의 질, 성취의 질, 또는 심성의 질에서 결국 판가름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쉽게 바꿔 말하자면 그 사람이 얼마만큼의 거리를 많이 달렸느냐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제대로 된 길을 바로 걸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더라는 얘기입닏. 교회식으로 말하는 소위 영혼의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단 한 번뿐인 귀한 자기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옳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국한해서 따져 본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도출될 정답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필요’ 여부나 우선순위도 덩달아 달라지겠지요? 쫓기듯 살아온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한 호흡 멈추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귀한 일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필코 성공적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삶의 목표들이 있겠습니다만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영원한 가치를 지닌 최상의 길 하나를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많은 훌륭한 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교회생활을 첫번째 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택해서 추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유익의 길을 외면하는 것처럼 손해보는 일생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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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 많은 전도사 너무 싫어!
전도사한테 한 번 걸렸다 하면 이건 완전히 사람 병신된기 딱 알맞다. 어찌나 집요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학질을 떼는 기분이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로 자기네 일방적인 주장만 늘어놓는데 그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할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비합리적인 얘기들이어서 정상적인 이성으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다. 게다가 자기 혼자만 세상이치를 다 아는 듯이 독선적으로 떠벌린다. 그럼 나는 골빠진 병신이란 말인가?
찐빵의 생각 삶의 신고를 통해서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절대의 힘과 절대의 사랑을 가진 단 한분의 존재가 그렇게 절실하게 소중하다는 필요 앞에마주서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막연하게 그냥 기다리는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될 줄 압니다. 전도사님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 일 터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기실따지고 보면 아쉬운 것은 전도사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는지요?
?4 부자교회, 천국 갈 수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부자 교회들이 많은 곳도 아마 없지 않을까? 신도들보고는 부자 되기를 포기하라 하고 교회는 다투어 부자 교회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 아닌가. 끝이 보이지 않는 탐욕을 그러싸한 명분으로 위장하여 냐?이 갈수록 뚱뚱하게 살쪄가는 비만증 교회들,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의 숫자를 앞세워 툭하면 압력단체로 군림하곤 하는 권세 높은 교회들이 내 눈에는 별로 존경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찐빵의 생각 깐깐하고 검소한 예산 집행 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부자 교회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예산은 어느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교회의 교육사업, 선교사업, 자선사업 등으로 쓰여지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이
우리 사회에 다시 환원되는 성질의 것이랍니다. 다만 그것들이 말씀의 본디 뜻에 따라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사회인들한테는 잘 알려지지 않을 뿐입니다.
좋은 일 좀 했다 해서 떠들썩하게 제 자랑하는 교회를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부자 교회보다는 그렇지 못한 극빈의교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예로 기장 교단의 경우를 한 신학자가 조사한 것을 보면 신도 수 50명 미만인 교회가 전체 348개 교회 중 286개나 됩니다. 목회자의 월 사례비는 전체 평균액이 533,000원이랍니다. 특히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5.5%가 교사, 농업, 건축, 우유 배달, 청소부 등의 부업을 하고 있고, 사모들의 10.9%가 공무원, 유치원 교사, 간호사 미용사, 도배사, 보험 설계사 등의 취업 전선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넉넉지도 않은 성도들의 헌금에 자신의 생계까지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들이겠지요. 젊은이가 지적한 소위 부자 교회로 분류되는 비율은 아마 전체의 1%가량도 못마땅하다하여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멀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젊은이의 중대한 자가당착이 될 것입니다.교회는 절대로 겉만 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5.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
찐빵의 생각 우선 지금껏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를 얼마나 사랑해 오셨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유복하다 할 수 없는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명문 학교의 학생으로 좋은 성적을 성취하게 해주신 축복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기로 권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젊은이의 생명을 과연 누가 주셨는가. 젊은이의 영특한 두뇌와 재능과 의지력을 누가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 지구상에는 훌륭한 위인도 많고, 위대한 예술가도 많고, 뛰
어난 과학자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는 원래가 보잘것없는 한 줌 흙이었습니다. 그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바로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님의 깜깜한 뱃속에서 어머님의 핏줄을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태아가 당장 제 눈에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제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형국일 것입니다. 만일 어느 날 뱃 속의 그 태아가 소리를 내어 “보이지도 않는 엄마 같은 것은 내게 필요 없다.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이다.”하고 외친다면 젊은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쥬라기 시대의 공룡보다 더 힘 센 동물은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룡의 그 힘보다 더 덧없는 힘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의 패기, 젊음, 총명..., 그것의 한계는 과연 영원하고도 완벽한 것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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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술 담배도 이해못하는 교회, 이해 안 돼!
술과 담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의 문제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신앙생활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술 담배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물에는 이해의 양면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교회에 나가야 된다면 나중에 술 담배 끊고 나서 한 번 고려해 보겠다.
찐빵의 생각 교회가 그것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 인체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고귀한 성전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성전을 술이나 담배 따위로 오염시킬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사실대로 말하자면 술이나 담배가 우리 몸에 이로울 것은 없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는 몸 쪽보다는 정신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술 담배를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야면이 있다는 절음이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해로움을 피하여 이로움만 취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겠지요?일단 교회에 나가보세요. 술 담배 따위와 싸우기는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아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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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교, 미신과 뭐가 다르담?
찐빵의 생각 미신들의 공통점은 물리적 가시성과 과학적 논리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어쩌면 종교도 그 부분만 보자면 미신과 대동소이한 면을 갖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자칫 미신과 종교를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고 보기가 쉬운데 바로 거기에 세속적인 우리 인간 지능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한때는 그런 유물론적 관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까짓 밑져야 본전이라는 단순한 생각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애의 지표로 한 번 삼아 보겠노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형국으로 뜬금없이 성경책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나이를 많이 먹고 난 후의 일이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문득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아 가장 비과학적이고 가장 비논리적인 것처럼 여겨 왔던 성경 말씀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게 ‘과학적’ ‘논리적’일 수가 없더란 얘기입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정치사, 문화사, 정신사를 정학히 꿰뚫는 그 완벽성하며, 한 치도 오차가 없는 그 절절한 윤리관의 정의하며, 진실된 삶의 가치관을 명쾌히 규정한 그 투명성하며, 미완성의 과학 수준이나 그 가설적 본질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내 정신을 매료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현재 닿아 있는 그 시점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먼발치서나마 자주 홀깃거려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분보다 더 매력적인 인물이 인류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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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타종교, 타종파에 너무 배타적이다.
타종교, 타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말씀에서 ‘이웃’은 이웃종교도 포함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찐빵의 생각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남을 해코지하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데서는 부분적으로 일치합니다. 허나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납니다.
첫째, 우리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엄연히 적시한 성경 대목입니다. 바로 이 생명 지음 받음보다 더 감사한 일을 달리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바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차원의 사랑을 달리 찾아보실 수 있는지요?
셋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3일 후의 부활을 예언하시고, 꼭 그대로 어김없이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신격의 증거를 달리 찾아보실 수 있겠는지요?
이와 같은 엄연하 교리의 차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설득 방법의 미숙으로 인해 그것이 세인들의 눈에 배타적, 비판적, 이기적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교회의 잘못일 것입니다. 기독 사상의 근본 정신은 온유와 인내와 포용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군요.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오로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바치신 그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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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종교 없어도 불편함 못 느낀다
왜 그렇게 종교인들은 전도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종교가 없어도 전혀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 ‘좀머씨’의 말처럼 날 좀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산 속의 산토끼도, 노루도 꽃과 나비도 종교가 없지만 그냥 섭리대로 잘 살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편하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 못지않게 나는 자유주의자였고 낭만주의자였고 인본 개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왜 나이 쉰이 다 되어서 아차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만났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옳다고 믿었던 그런 내 방식대로의 생활 자세가 결국 하나뿐인 내 삶의도식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방식의 삶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잠복해 있었고, 나의 그런 자유방임적 인생관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번민가 고뇌가 난마처럼 얽히고 꼬여 이제는 더 이상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을 즈음에 나는 한 줄기 눈부신 구원의 서광을 찾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는 헛것들로 가득 찬 나를 비워내고, 꽉 막힌 나를 뚫어내고, 그렇게도 무거웠던 운명의 짐, 자업자득의 짐, 그리고 끝간데 없는 욕망의 짐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내 방식대로가 아닌 말씀의 방식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오리무중이던 시야가 밝게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따라 손을 뻗으면 거기에 올라갈 사다리가 있었고, 말씀에 따라 발을 내딛기만 하면 그곳에 어김없이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감에 닿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외면하고 살았던 성경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그렇게 꿀맛처럼 감사히 영접해 맞아들인 연유가 그러합니다.
종교는 바로 그 죄를 사함 받고 영혼의 구원을 얻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만일 “내겐 종교가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영혼의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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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모님이 반대하신다
찐빵의 생각 아직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완고히 묶여 사시는 어른들이 참 많지요. 그것은 그분들이 종교를 ‘생명의 빛’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단순한 관습적 타성에 젖어서 관념적으로만 여겨온 데 까닭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체된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생의 전기를 마련하자면 우선 젊은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 구원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를 먼저 인식하고 체험하는 게 순서일 줄 압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유익된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녔습니다. 성경의 일차적인 매력은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같이 다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올바른 길에서 끝내 승리하게 하는 놀라운 비법의 보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젊은이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 승리하는 삶을 개척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부모님께도 효도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새로운 삶을 함께하기 위해 젊은이는 부모님을 향하여 자신있게 설득 권면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있습니다. 자식이 올바른 삶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것을 싫어하실 부모님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그 행복한 삶의 요람으로 부모님을 모셔들이는 일 또한 자식된 도리가 될 것입니다.
부모님이 교회생활을 반대하신다고 해서 쉽게 포기해 버리는 그런 나약한 젊은이가 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 힘을 내서 지금 당장 ‘생며의 빛’을 움켜잡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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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용한 교회 어디 없나?
성스럽고 신성한 교회, 그래서 아무때나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을 때 누구나 부담없이 들어가서 조용히 자신을 의지하거나 회개하거나 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는 목사나 교인들의 극성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기가 겁난다. 어디에 사는 누구냐는 둥,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느냐는 둥, 전화번호와 주소가 어떻게 되느냐는 둥,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떻고 어떻다는 둥, 영혼구원이 어떻고 어떻다는 둥......., 한 번 잘못 걸리기만 하면 혼쭐이 날 만큼 고역을 치러야 한다. 만일 그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금방 냉담해져 버린다.
찐빵의 생각젊은이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누구든지 부담없이 마음놓고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려면 경비원이 제지하고, 사찰에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하는 현실은 세상의 편의를 위해 원칙을 무시한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의 문을 무인지경으로 항시 열어둘 수 없게 된 것은 교회의 탓이 아니라 아마 세상의 탓일 것입니다. 예배 집회를 위해 항시 깨꿋이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성전이 무시로 드나드는 신분 불명의 불청객(?)들에게 개방된다면 차마 그 뒤치다꺼리르 다 감당하기가 어렵겠지요.
문제는 교회의 문이 잠겨 있나 열려 있나가 아니라 교회를 보는 이의 마음 자세, 그리고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심정 여하에 달려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굴절된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면 굴절된 교회만 보일 것입니다. 교회 탓하지 말고 젊은이 자신의 심성을 먼저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12. ?교인 아니면 다 사탄인가?
?교회의 일방적인 이기주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네 종교를 믿으면 천사요, 안 믿으면 악마라는
식의 억지 논리를 누가 과연 믿을 것인가. 교회식 논리에 따르자면 마이클 잭슨도 사탄이고 스필버그도 사탄이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옷을 일이다. 그러니 성인이 된 내가 어떻게 그런 억지논리를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대다수 현대인의 공감을 사려면 교회의 논리도 이제 그 폭을 한참 넓혀야 할 것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기독교가 기독교 아닌 모든 것들을 사탄시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잘못 와전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독정신의 근본은 타인을 사탄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을 긍휼히 여겨 사랑하고 그 영혼을 원죄로부터 구원하는 데 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마이클 잭슨이나 스필버그도 사탄이 아니라 전도와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바림직한 것은 교회를 밖에서 겉모양만 볼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안에 들어와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참모습과 만나는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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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기독교는 외래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 앞을 지날 때보다는 절 앞을 지날 때 마음이 훨씬 편하다. 아무튼 종교라는 게 대충 다 그게 그거라면 왜 우리 종교를 마다하고 서양종교를 믿는지 모르겠다. 전통을 숭상하는 민족 자존심은 어디로 갔나?
찐빵의 생각 요즘 젊은이들은 종교를 대충 사념이나 관념의 치장쯤으로 허술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종교는 ‘그게 다 그거’가 아닙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외래종교, 불교는 전통종교로 알고 있는 듯한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래로 치자면 기독교나 유고나 불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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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상하여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고, 유교는 중국에서 생겨나 불교와 비숫한 무렵에 고구려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가 순수한 우리민족 종교라면 불교나 유교가 아니라 상고시대의 주술적 기복신앙이나 조선 말기 실학사상, 동학사상을 근간으로 한 천도교나 증산교 등을 꼽아야 옳을 줄 압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과연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 중의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냐 하는 물음일 것입니다. 이 물은 ‘대충’ 기분으로 가볍게 이루어지거나 답변되어서는 안 될 물음입니다.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갖고 이루어져서도 안 될 물음입니다. 왜냐면 이 물음이야말로 우리 생의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구획짓는 최후의 물음이고 운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타종교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모두가 저 나름대로 우리의 혼탁한 사회현실을 정화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하나씩 맡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는 내게 특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우리 대신 스스로 ‘사랑과 구원의 피’를 흘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앙의 대상 가운데 사랑과 희생의 화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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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광신도들들의 광적 행태 무서워!
하나님께서 과연 남의 눈에 너무 튀는 그런 광적인 삶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일까? 교회라는 델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자칫 나도 그렇게 물들까봐 솔직히 겁나는 부분이 많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찐빵의 생각 우리가 놀이터의 청룡열차를 탄다고 가정합시다.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그 경이적인 속도감을 조용히 혼자서 참아냅니다. 아니, 속도감을 즐기는 반응 양상이 그렇게 조용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속도감에 대한 쾌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드리는 모습도 그렇게 조금씩 다르답니다. 어떤 이는 혼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기도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에 감동한 나머지 격정적인 감정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제3자가 한마디로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성질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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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모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신앙 자세를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다른 이들의 모습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을가 싶습니다. 신앙에도 질이 있다면 그 질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이 과연 진리 중의 진리로구나하는 깨우침에 도달하는 일, 그리고 그 깨우침에 기필코 나도 한 번 도달해 보겠다는 각오 아래 말씀공부에 임해보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경 젊은이의 닫힌 마음문도 조금씩 열려질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신앙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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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허황된 성경얘기 어떻게 믿나?
기독교 교리를 깊이있게 잘 모르는 처지에서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힌 성경에는 너무나 허황된 얘기들이 많다. 미신 같은 천지창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노아의 홍수’같은 사건들은 너무나 허황되어 보인다. 지금은 주술적 공상시대가 아니라 사물의 이치가 명명백백한 과학시대인 것이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운 초신자나 비시자들한테 성경을 제대로 이해시키려면, 성경채 뒷부분에 해명성 해설기사(?)라도 함께 실어서 독자를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옳을 것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문제로 제기한 노아의 방주나 노아의 홍수 얘기도 그렇습니다. 40일 동안이나 비가 내렸고 그 비가 천하의 산들을 다 뒤덮는 대홍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언뜻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박사학위를 가진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창조과학>을 조금 더 인용을 하면 성경은 노아의 방주가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라랏 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그 홍수가 유프라테스 강 정도를 범람시킨 국부적 홍수였다면 노아의 방주는 강 하류를 따라서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대홍수에 대한 전설기록은 지구 도처의 많은 민족들 간에 공통되게 전해지고 있는데 그 설은 지금까지 수집된 것만해도 27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특히 미대륙 인디언들이 남겨놓은 점토판에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아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궁창 위의 물로 인해 일그러져 보이는 태양, 물 속에 빠져서 아우성치는 사람들, 비가 내린 40주야를 상징하는 40칸의 네모판 그림, 나뭇잎을 문 채 날고 있는 새, 커다란 배, 그리고 그 옆에서 하늘을 향해 경배를 올리고 있는 네 남자와 무지개가 뜬 가운데 배로부터 각기 한 쌍씩 나오고 있는 갖가지 동물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일찍이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어떻게 노아의 홍수 사건을 그토록 성경 내용과 똑같이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담으로부터 시작돼 인류의 번성은 홍수 이후 노아의 가족을 유일 조상으로하여 다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평균 지구상의 인구가 0.5%씩 증가했다고 했을 때, 노아의 가족인 네 쌍의 부부로부터 현재의 50억이 넘는 인구에 도달하기까지 대략 4,000년의 기간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입니다. 창조론은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고 역사학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무제를 앞세워 성경의 엄연한 사실 역사를 ‘허황된 얘기’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얄팍한 지식이 아닌, 진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젊은이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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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팔자 편한 사람들이나 다니는 곳이 교회 아닌가?
찐빵의 생각 교회는 ‘팔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쪽이라는 사실을 젊은이가 올바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뇌와 비탄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앞에 영육의 전부를 의지하고 사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이 함께 모인 ‘천국’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행복한 인간들을 축복하려고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죄 많고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감싸안으며 그 가엾은 영혼들을 구원할 오롯한 목적 하나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혹스런 운명의 꼬임도 말씀의 능력을 통해 한 수간에 다 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 모든 고통의 원인, 모든 죄악의 무게와 그 본질을 누구보다도 훤히 다 꿰뚫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눈을 떠서 교회를 바로 보고, 그리고 눈을 감고는 자신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그분 앞에 살며시 내려놓아 보기를 권합니다. 우선은 성경말씀을 한 번 찬찬히 잃어보는 것이 순서일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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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이상하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의심은 세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의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인간세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그 아드님, 즉 우주에 유일하신 신의 세계를 얘기하고 잇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은 죄악으로 물든 이 혼탁한 세사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려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하나님의 뜻, 즉 성령에 의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잉태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네 보통 인간으로 보려 하는 데서 부터 젊은이의 잘못이 비롯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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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조창생을 다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짦은 경험과 얕은 지식 잣대로 가늠하려 하는 것은 애초부터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흙을 빚어 인간의 형상을 만든 다음 거기에 스스로 생명력의 숨을 불어놓어 우리를 만드시니 일에 비한다면 당신이 점지하신 한 처녀의 몸 안에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는 일쯤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 일의 어렵고 어렵지 않고에 있는 게 아니라 죄악 투성이인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내려 보내셨다고 하는 그 무한한 사랑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 또한 보통의 인간이 아닌 성모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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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건축헌금 무서워 개척교회 못 가겠다
찐빵의 생각 알게 모르게 신앙과 물질이 이처럼 자주 정면으로 부닥치는 우리 교회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마지막 안식처로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인데 오히려 안식처가 ‘부담처’가 된다면 그것은교회의 존재 의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려운 가정경제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건축헌금을 하라고 강요하는 교회는아마 없을 것입니다. 또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신도들의 경제효율성을 감안하여 아예 독립된 자기 성전을 따로 짓지 않겠노라고 공식 선포를 하고 대신 학교나 회관등 공공기관의 시설 일부를 빌료서 당당히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일정액의 물질을 드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교회로부터 얻는 정신적인 위안과 축복과 은혜의 분량은 그야말로 물질이나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이나 마음을 그냥 공짜로 받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를 드리면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열 배로 되갚아 베푸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기쁨이나 보람은 마음과 물질을 드려본 이들만이 느껴 누릴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축복이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닿지 않으면 건축헌금에 대해서 신경 쓰시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능력대로만 바치면 그것으로 족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늘 들여다보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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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세상 문화를 모두 사탄으로 매도하는 비현실성
지나친 경건주의인가 아니면 종교 이기주의인가. 우리나라 교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현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너무 좁은 것 같다. 대중들이 오락으로 즐기거나 예술적 창작 행위로 표출하는 영화, 텔레비전, 음악, 연극, 무용 등은 대부분 다 사탄이라고 매도해 버린다. 음악도 찬송가나 찬양곡만 음악이고 연극이나 영화도 성극이 아니면 다 사탄이다. 특히 전위적인 음악 등 새로운 예술 장르는 아예 악마의 굿거리쯤으로 취급해 버린다. 인류의 정신 사조적 추이와 아름다움의 새로운 가치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예술 창작 표현행위가 다 사탄이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봉건 중세기의 고루한 사고방식만 최고의 가치로 알고 진부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교회에 식자들은 많으나 새시대를 능동적으로 앞서 개척할 만한 용기를 못 지녔다. 앞선 자는 손해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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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현실 안주만을 안일하게 탐하다가는 지난날의 불교나 유교처럼 기독교도 머지 않아 시대에 뒤처진 ‘골동품 종교’로 낙후될지 모를 일 아닌가.찐빵의 생각 시대는 계속 변천하고 있으며 가치관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신도 시류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신도 시류에 따라서 끝없이 각색디고 윤색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향후백년쯤 뒤의 성경 해석이 과연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의 위대함이 어디 있다고 보시는지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뭇 제국의 흥망성쇠가 수업이 거듭되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황금의 빛처럼 그 가르침의 엄정하심과 예언의 정확하기가 예링한 칼날처럼 오늘날까지 생생한 진리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는 과연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인간 정신 활동이나 행동규범은 본디 제한됨이 없이 움직이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모든 시대의 흐름과 인간의 변화해 나갈 모든 몸짓들을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예견하시는 가운데 그 모든 시대와 무든 움직임과 모든 가치들을 빠짐없이 하나로 꿰뚫는 불변의 진리를 말씀으로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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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일러 우리는 성경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율법이기 이전에 우리의 취할 바 행동양식이며 우리가 추구할 바 살아 있는 행동의 규범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그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비타민C라는 물질을 발견한 공로로 1938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과학자 엘버트 젠트교르기 교수가 평생의 과학철학을 집대성한 책 한 권을 만년에 쓴 일이 있습니다. 그책M 제목을 ‘The Mad Monkey\'(미친 원숭이)였습니다. 놀랍게도, 인류의 그가 이룩한 과학문명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는 예견이 그 내용입니다. 새로움의 탐욕에 사로잡혀 끝간 데를 모르고 달리는 우리 인간의 초상을 미친 원숭이에 비유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새로움에 집착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언뜻 낡아 보이는 가치를 외면하지 않기 바랍니다. 아무리 빼어난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이면 이미 낡음일 터, 영원히 변치않는 최후의가치는 역시 이천 년 전에 우리가 은혜로 받은 단 하나의 말씀뿐입니다. 영민한 젊은이의 두손을 꼭 잡고 이말만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예술도 새로운 과학도 결국은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20 무교회 종교론에 공감한다
?고 함석헌 선생의 무교회 종론을 읽었다.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이 혼자서 성경공부를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 조직에 얽매이다보면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교회는너무 탐욕적이고 아전인수적이다.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마구 겁준다. 공짜 노력 봉사와 공짜 돈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한마디로 염치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신도들로부터 챙기면서 감사는커녕 그것들이 다?사람 덕분이라고 했다가는 빚쟁이로 몰릴까봐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속보인다. 공짜만 밝히는 그런 놀부 같은 교회들 말고, 진짜 돈 욕심 없는 흥부 같은 교회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신도들의 ?돈을 노리지 않고 자기의 재산을 스스로 바쳐서 하는 목회가 진짜배기 아닐까?) 아무튼 나는 착한 사람은 되고 싶으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 때문에 교회에 가기는 싫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경오를 나는 감히 불효자식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낳아즈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부모님의 명령이나 부모님의 부양 으무 따위를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불효자식을 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불효 자식들에게 일정한 틀이 있지요. “누가 날 낳아 달라고 언제 부탁하기라도 했나?”, “왜 귀찮게 이래라 저래라 ?내게 명령하나?”, “무슨 유산 물려준 게 있다고 내게 의탁하려 하나?”등등 입니다. 부모와 하나님이 동격이라면 교회는 가정과 동격이 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부모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고, 교회를 부정하면 가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부모님과 가정을 버리고, 그렇게 혼자 가출해서도 그럭저럭 연명은 하겠지요. 그러나 그 생애가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늬 과겨간 표현은 일시적인 젊은 객기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섣부른 무교회 종교론의 지지 배경을 유추한컨대 치열한 자기탐구의 벼랑에서 모험적 자기싸움을 통해 나름의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설파한 함석현 선생의 소위 ‘무교회 종교론’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젊은이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의학서적 한 권만 있으면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