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으면 죽었을텐데…'식의 말 가장 마음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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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8일 (토) 13:23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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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으면 죽었을텐데…\'식의 말 가장 마음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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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위해 내민 이지선(29)씨의 손. 엄지를 빼고 손가락의 끝 마디들은 모두 절단돼 뭉툭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옷으로 가려진 그 작은 몸의 안쪽까지 화상 자국은 선명했다. 웃는지 찡그리는지, 표정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늦가을 미국 보스턴의 호텔 숙소에서 그녀의 실물을 나는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2004년 유학 와 현재 보스턴대학에서 석사 과정(재활상담)에 재학중이다. 이제 말문을 열어야 할 때였다.
“혹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극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녀가 반문했다.
“정말 그런 의문까지 드세요?”
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꽃 같은 여대생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런데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지선아 사랑해’라는 글을 쓰는 그녀를, 독자들을 그 ‘밝음’으로 열광시키는 그녀를, 나보다는 한참 나이가 어린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TV의 공익광고에 출연해‘희망을 응원합니다’라며 보스턴의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모는 그녀를,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욕칠정(五欲七情)을 가진 인간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까지 연극이 되나요? TV에서 제 얘기를 ‘인간극장’으로 찍을 때(2003년), 제작팀에서 ‘콘티’를 짜왔어요. 제목이 ‘울지마 지선아’였어요. 저나 우리 식구들이 겉으로는 밝은 체하지만, 실제는 남몰래 슬픔으로 지새우는 줄로 알았나 봐요. 그렇게 ‘신파’ 쪽으로 생각을 하고 오셨는데, 도통 안 우니까 나중에는 제목도 바꾸고 다 바꿨어요. 지금은 많이 회복돼서 웬만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옛날에 진짜 아팠을 때도 종일 침울했을 때도, 늘 감사하고 기쁜 것을 찾았던 것 같아요.”
―그 상황에서 무슨 기쁘고 감사할 게 있나요?
“안 그러면 살 수 없었으니까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훨씬 어려워요. 포기하는 게 더 쉽죠. 그만 죽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상황이었죠. 그래도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살고 싶다는 의욕도 거울을 보면 번번이 좌절되지 않았나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정말 이 얼굴로 어떻게 살아요? 그러니 감사하고 기뻐할 것을 찾아야지, 만약 감상(感傷)과 우울한 기분에 빠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밖에는 답이 없어요. 그래서 거울을 보면 ‘이 얼굴로 어떻게 살아’가 아니고, 솔직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꽤 귀엽다’ 이런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이 얼굴을 내 걸로 그냥 받아들였던 거죠.”
2000년 7월,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귀가하는 길이었다. 그녀가 탄 차는 신호선에 멈췄다. 그때 음주운전자의 차가 뒤에서 들이받았다. 그녀는 잠깐 정신을 잃었고, 차는 폭발했다. 짧은 순간이 운명을 바꾼다. 그녀는 전신 55%의 3도 화상을 입었다.
―사고 난 뒤 처음 거울을 봤을 때는요?
“병원에서 7개월쯤 누워있는 동안, 눈 코 입만 내놓고 얼굴은 붕대로 칭칭 감겨있었지요. 얼굴에는 피부가 없었죠. 안경을 쓸 수가 없었고. 그러니 무얼 볼 수 없었죠. 피부 이식을 받고 집으로 퇴원해, 식탁에서 숟가락에 비친 내 얼굴, 노래 제목을 보려고 한 CD판에 비친 내 얼굴, 밤 유리창에 쓱 비친 내 모습, 정말 내가 외계인같이 느껴졌어요. 그때 ‘난 아무것도 본 게 없어’라며 머릿속으로 내 모습을 지우려 했지요.
한번은 TV를 보다가 혼자 재미있어 웃다가, 내가 더 이상 이런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어 하는 시절이 지났고,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에 가슴 아파할 수도 없고, 난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나는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어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가족에게 신경질을 부렸나요?
“결국은 저 혼자만의 싸움이었죠.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고. 엄마 아빠의 짐에다가 내 마음의 짐까지 더 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로 인해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것이 싫었어요.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그렇게 걱정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고, 오히려 저도 같이 우울해지니까. 저는 계속 농담하고 다른 사람들을 일부러 놀리고 웃고 그랬어요.
되돌아 생각하면 저는 제 모습을 못 보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제 ‘무서운’ 얼굴을 보고 있잖아요.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 제가 아무리 농담을 한다고 해도 별로 웃기지 않았을 텐데, 이분들은 예전의 나로 그냥 그렇게 대해주셨어요.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제가 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집안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죠?
“저는 막내고 작고 귀여웠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 사건 후 오빠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고, 오빠가 저를 구해냈는데, 제가 계속 아프니까, 차라리 불타는 차에서 안 구해냈던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지선씨가 알려진 것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면서였는데, 왜 글을 쓰게 됐죠?
“저를 보고 걱정하는 것이 싫었어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 마음까지 걱정할까봐. ‘이 말은 물어봐도 되나? 궁금하지만 여기까지 건드려도 되나?’ 이런 생각들을 하지만, 제게 물어보는 데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저 자신을 먼저 열어놓고 싶었어요. 여기까지는, 이 마음까지는, 내가 정리가 돼서 열어놓을 수 있다, 지금 수술 상황은 이렇게 됐고, 간혹 침울해질 때도 있고, 그걸 또 추스르는 마음도 있다, 일기처럼 썼어요. 그 내용이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런 마당에 남 걱정할 여유가 있었습니까?
“제 상황은 50인데, 사람들이 지레짐작으로 ‘쟤는 100쯤 될 거야’라면, 이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잖아요. 그 걱정을 한다고 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게 싫었어요. ‘쟤는 항상 밤마다 울 거야’ ‘쟤는 지금 우리와 농담하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는 분명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거야’, 이런 생각을 주는 게 싫었어요. 그게 아닌데.”
―자신의 상황을 뭐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심각했잖아요?
“감정의 과잉이 싫었어요. 내게 생긴 일들을 부인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과소평가 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얼굴은 이만큼 남아있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데는, 어떤 막연한 믿음이 아주 컸어요.”
―막연한 믿음이라면?
“당초 제 손가락이 모두 절단될 줄은 몰랐어요. 그전까지 붕대에 감긴 오른손을 전혀 쓸 수가 없었어요. 손가락이 끝까지 다 있었지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 거예요. 모양만 있으면 뭐하나 싶어, 수술을 받고 손가락이 짧아지더라도 움직일 수는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또 내가 이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다음 날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오른손가락만 자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양손을 다 해야 되는 것이었어요. 정상이라면 거의 패닉 상태일 수밖에 없잖아요. 오른손을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왼손도 잘라야 한다…. 막 울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어요.”
―그건 체념의 힘인가요?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버린 적이 없으니, 체념은 아니에요. 당시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오빠가 나를 좀 더 늦게 구했다면 팔 전체를 다 잃을 수도 있는데, 여기까지만 자르는 것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께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했거든요. 모르겠어요. 원래 성격이 낙천적인가 보다,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하세요. 하지만 이게 정말 낙천적인 것으로만 되는 거 같지는 않아요.”
―가해자인 상대방 음주운전자에 대해 원망했겠지요?
“혹시 합의해달라고 그 가족들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안 왔대요. ‘혹시 오면 내가 용서해주고 싶다고 말해달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었어요. 그냥 그 말이 나왔어요. 나중에 그분 가족들이 오지 않은 것을 굉장히 감사했어요.
나를 이렇게 만든 가해자가 있다, 이런 생각에 분노가 들끓고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아도 됐으니. 가해자 존재 자체를 그냥 잊고 살았어요.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고. 굳이 알려고 하면 알 수 있었겠지만. 그냥 말로 용서하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대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원두커피를 끓여와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러면서 “내가 지선씨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가해자를 눈으로는 안 봤지만 그래도 원망이 없다면, 이는 보통 인간의 마음이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화상 입은 두 손으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이 고통 안에 가해자까지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고통이 너무 커서 가해자를 미워할 생각까지 할 수 없었어요. 어쩌면 그 사람에 비해 내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지금 아프고 불편하지만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감옥에 갇힌 그 사람보다는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나빠지려면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정말 감사할 일입니까?
“내 인생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다가,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됐죠. 아마 내가 죽었으면 오빠도 못 살았을 거예요. 그러면 엄마 아빠는 어떡해. 그런 생각 끝에는, 내 고통은 분명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죠. 화상은 죽는 데서 시작했으니 점점 좋아질 일밖에 안 남았다, 그래서 감사했던 것 같아요.”
15시간의 비행으로 지친 탓도 있었고, 극도의 피로감으로 이날은 여기서 작별했다. 다음 날 그녀는 빨간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목도리를 두르고 나왔다. 옅은 화장품 냄새도 났다.
―예뻐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죠?
“제가 예뻐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사고 난 뒤로는 예전처럼 옷을 입지 못했어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거는 것처럼 너무 안 어울려요. 항상 큰 바지에 큰 셔츠를 입고 다녔어요. 그때는 똑바로 서있지도 못했어요. 척추에 압박이 오니 고개도 못 들었고, 눈도 다 안 감기고 항상 건조했어요. 사진을 찍어도, 나는 웃고 있는데 표정은 화가 난 듯했어요. 몸 상태가 점점 좋아지면서, 재작년부터는 ‘다시 화장해도 괜찮구나’‘치마 입어도 괜찮구나’생각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데 정말일까요?
“누구나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부터 인식하니까요. 그런 풍조를 따라가면 저는 계속 절망일 수밖에 없죠. 다치면서 크게 깨달았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든지 없어지고 썩는다는 거죠. 그동안 내가 없어질 것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던 것을 몰랐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선씨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병원에 통원치료를 받을 때 한 아이가 저를 보고 ‘괴물’이라고 했어요. 너무 충격이어서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온 세상이 정지한 듯하고, 귓가에는 계속 그 소리만 들렸어요. 겨우 어린애의 말이었는데도. 제가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어요. 이런 아이들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는 내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어느 날 ‘괴물’로 되었다니. 서러워 울면서 많이 기도했던 것 같아요. 또 할머니나 아줌마들이 ‘젊은 여자가 쯧쯧쯧쯧’ 혀를 차는 것도 싫어요. 내가 그렇게 동정받을 만큼 불행한가, 나는 그렇게까지는 불행하지 않은데.”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파요?
“지금도 가끔 그런 이메일을 받는데, ‘나 같으면 못 살았을 거다. 자살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살아서 참 대단하다’라는 식의 말 입니다. 마치 내가 굉장히 독해 살아있는 것처럼. 물론 그분들은 저의 삶에 대한 용기를 칭찬해주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또 저 자신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화상 환자’라는 수식어도 그래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제는 지겹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화려하지도 좋지도 않은 수식어가 계속 붙는 것이. 제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박사가 돼도, 그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니겠죠.”
―대학교 4학년 때 사고가 났으니, 그때 사귀는 남자가 없었나요?
“별로 연애를 오래했던 적도 없었고. 그 당시에 만약 있었다면 얘기가 복잡해졌을 텐데. 이제는 나이가 이렇게 되도록 심각한 연애를 못 해봤다는 것이 창피하지만. 그때는 짠할 만큼 연애를 했던 사람이 없던 게 오히려 감사하더라고요.”
―그전에도 말끝마다 ‘감사 감사’했습니까?
“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감사하다’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참 좋아요. 감사할수록 제 삶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뒤돌아 보지 않게 되고. 그렇게 한들 제가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유치원 선생님이 됐든지 회사를 다녔든지, 사고 나기 전 대학원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공부를 좀 더 하다가 회사를 다녔든지, 아마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살았겠죠. 그런 삶을 못 사는 것에 대해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이 있었어요. 한번은 백화점에 앉아있는데 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아기를 데리고 쇼핑하는 걸 보면서, ‘난 못 하겠구나. 나는 저런 삶은 못 가지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
―지금도 그런가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안 해요. 내가 지금껏 소망했던 일들이 차근차근 이루어졌던 것처럼, 이것도 소망하고 있으니까. 때가 되면 좋은 사람 만나고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시내로 나와 베트남국수와 새우튀김을 함께 먹었다. 음식점은 붐볐는데, 아무도 화상 입은 그녀의 마음 행로(行路)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헤어지면서 물었다.
―살면서 무엇에 가장 가치를 두나요?
“생명이오. 감히 내가 그 사람을 다 모르면서, ‘나 같으면 죽었을 텐데’라고 쉽게 말하는 식으로, 생명이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어떤 사람들을 보고서‘아, 저러고도 어떻게 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도 그 나름대로의 삶이 있고, 그 사람 안의 생명은 정말 그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건데. 그 사람 안에 생명이 있다면,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이지선은??
이대 4학년 때 전신 화상… 보스턴大 재활상담 전공 중?
그녀는 이화여대 4년 때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그녀의 표현을 옮기면 “병실에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싸움을 시작한 나는 더 이상 이지선이 아니라 ‘BURN(화상)’으로 불렸다. 여덟 개 손가락의 절단으로 지문도 없어져 나만의 고유성을 보여줄 지문도 잃었다”고 했다.
그동안 2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방학 중에는 재건 성형수술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솔직한 얘기를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됐고, 그 뒤 ‘지선아 사랑해’(2003)라는 제목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해 TV의 ‘인간극장’에도 소개됐다.
그녀는 미국 보스턴대에서 석사과정에 있고 박사 과정을 계속 밟을 계획이다. 보스턴대학과 온누리교회에서 주는 장학금, 인세 등으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는 재활상담을 전공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이 힘을 합쳐줬고, 교회에서 정신적으로 지지를 받아, 나는 이겨낼 수 있었다. 정말 너무나 큰 힘이었다. 이런 지원이 없는 환자들은 몇 배나 더 힘들 것이다. 병원에 있으면서, 언제 나갈지도 모르지만 이런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은 여기까지 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고 당시 공무원이었고, 불길에 휩싸인 동생을 구하다가 팔에 화상을 입었던 오빠는 결혼해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다.
[최보식 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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