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선족(朝鮮族)과 러시아(엣 소련 연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려인(高麗人)은 우리의 다같은 동포들이다. 그런데 왜 재중동포 내지는 재러동포라 하지 않고 조선족이니 고려인이니 할까?
그이유는 중국과 舊 소련의 소수민족정책에 있다. 중국은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자치구역을 지정하여 그곳에 모여 살게 하였다. 그곳이 연변 조선족 자치구이다. 덕분에 조선족들은 우리말과 글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반면 舊 소련은 소수민족 흡수정책을 썼다. 자기민족으로 흡수 융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1세대 외에는 우리말도, 글도 잘 모른다.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말은 소련말로 \'카레이스키\'라고 하는데 영어로하면 \'코리언(korean), 즉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코리아(KOREA)는 고려가 외국에 알려지면서 고려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라는 거,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카레이스키(카레이=코리아=고려)+(스키=언=사람)\', 다시말해 카레이스키=코리언=고려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 아이들에게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물으면 대부분 \'중국사람\'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실제 중국에서 태어났고 국적이 중국이니 \'중국사람\'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舊 러시아 연방에 살고 있는 고려인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대다수가 \'나는 루스키 까레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이말은 러시아계 한국인이란 뜻이다. 그만큼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조국에 대한 자긍심이 엄청 강하다고 한다.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조선족은 외모도 한국사람과 똑같고, 언어 또한 한국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왜 그렇게 의식이 바뀌었으며, 고려인들과 그의 후손들은 외모도 많이 달라졌고(혼혈화), 언어도 전혀 다른 말을 쓰고 있는데 왜 그럴까 하고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필자도 잘 모르지만 이주하게 된 동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대부분 살기 위해 스스로 이주해 갔거나, 전쟁시 징용당해 끌려갔다 그곳에 눌러앉은 사람도 있고,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하여 눌러앉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舊 소령 연방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일본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동포들이며, 일본이 패망한 후?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舊 소련에 의해 사할린에서 집단적으로 강제이주 당한 동포들이다. 아래는 고려인들이 이주 당하게 된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해 기술한 것이다.
1. 한반도에서 사할린으로(군징용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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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과 45년 사이에 약 72만 5천명의 한국인 일반 노동자와 14만 5천명의 군징용노동자가 동원되어 한국 국내와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광산·건설현장·공장에 투입되었다.
그밖에도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이 전쟁 마지막 해에 터널, 비행장 혹은 다른 시설의 긴급 공사현장에 징발되었으며, 공장이나 군대의 매춘굴에 끌려간 여성과 소녀들의 수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줄잡아 100만명에서 150만명의 한국인이 징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민족을 뿌리째 뽑고자 하는 이런 대규모 징발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15만명의 한국인을 광산이나 비행장 혹은 다른 군사시설 건설을 위해 사할린으로 보냈다.
2. 사할린에서 중앙아시아로(강제 이주)?
1940년대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고려인(高麗人)들이다.
지금 러시아에서 볼 수 있는 고려인들은 보통 교포 3,4세 정도이다. 그들중 사할린이나 중앙 아시아 지역 출신들의 고려인들은 조금씩 한국어를 구사하지만,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등 대도시에 성장한 고려인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전혀 모른다.
한인들의 연해주로의 이주 시작에 대해서는 1862년, 1863년, 1864년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데, 이는 당시 재정러시아와 조선간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부정기적으로 혹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나들어도 그 수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가장 널리 알려지고 있는 학설은 한인 농민 13가구가 1863년 겨울에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 유역인 노보고르드(Novogord)에 정착한 것이 이민의 시초라고 주장한다.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원동지방으로 한인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아무르강 지방이 아이훈 조약(1858), 연해주 지역이 북경조약(1860)에 의해 극동지방이 국제적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부터이다.
교포들은 이주 경위에 따라 첫째, 1860년초부터 가난과 일제의 탄압을 주로 피해 북한지역에서 연해주로 넘어갔다가 1922년 연해주지역의 소비에트화로 국경이 폐쇠되자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부류와, 둘째 1939년-1945년간 사할린에 강제 징용되었다가 억류된 남한 출신으로 구분된다.
이렇게 독립국가연합내에 형성된 한인은 약 45만명에 달하며 사할린에 거주하는 수 천명의 무국적 혹은 북한 국적을 갖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거주지역의 국적을 갖고 있다.
연해주지역 교포사회가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은 스탈린의 농업집단화 정책 및 러시아화정책이 본격화된 1928년말부터이다.
스탈린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레닌의 \'신경제정책(NEP)\'을 버리고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추진하기 위해 중앙통제적 계획경제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스탈린 체제의 구축은 교포들의 경제활동 및 기타 문화활동을 크게 변화시켰다.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는 1937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 중순에 완료되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립국가연합내 체류자를 포함한 전체 한인 수는 461,145명이며, 이중 교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공화국과 카지흐공화국이다.
우즈벡 공화국 수도인 타슈켄트 부근의 집단농장에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카자흐 공화국에서도 수도인 알마타와 동북부 우슈베토 지방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은 광복 2,3년 전에 강제로 동원되어 탄광에서 일한 동포들로 광복후 미국과 소련간의 협정에 의해 일본인은 전원 일본으로 귀국하였지만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게 된 교포들로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일본에 배신당하였으며 독립된 조국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동포라고 믿었던 \'큰 땅치\'(중앙아시아의 한인)에게서도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 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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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독립국가연합 거주 동포 현황?
지 역 | 동 포수 | 체류자수 | 합 계 | 러시아 | 106,852 | 2,119 | 461,145 |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몰도바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 220,000 103,315 17,460 8,669 2,000 350 250 100 30 | 336 210 16 73 5 1 5 - - | 220,336 103,525 17,476 8,742 2,005 351 255 100 30 | 총 계 | 459,026 | 2,119 | 461,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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