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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의사의 눈물-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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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900회 작성일 08-08-21 19:11

본문

- 어느 청년의사의 눈물


그때 나는 오랜만에 1년차(레지던트) 임선생의 허락을 얻어 인턴 숙소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인턴이라면 다 그렇듯 나 역시 누적된 수면 부족으로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그리하여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곧 혼곤한 잠의 늪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런데 잠결에 이명처럼 아득하게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고 전화기를 찾았다. 그것은 인턴의 본능이었다. 새벽 3시, 전화기는 성난 개처럼 요란하게 짖어대고 있었다.

“여보시오.”

내 목소리에는 졸음과 반항기가 묻어 있었다. 모처럼 곤히 자는 사람을 또 깨우느냐는 항변이었다.

“소아과 인턴 선생님이죠.”

“그런데요.”

“3년차 선생님 긴급호출 입니다.”

간호사의 목소리는 차가운 물처럼 내 목덜미를 타고 흘러 내렸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음~”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가운 단추를 잠갔다. 감히 3년차 선생의 호출을 거부할 수 있는 인턴은 이 세상에 없다.

“내 팔자에 편히 잠자기를 고대했다니….”

환자는 병동에서 극성파 아버지로 유명한 박인철씨의 네살바기 아들 지수였다. 하늘같은 3년차 선생은 내게 배깅을 하라고 지시하고 ICU(중환자실) 환자들을 봐야 한다며 가 버렸다. 지수는 며칠 전부터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인튜베이션(기관 내 삽관)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배깅은 그 튜브에 연결된 고무백을 규칙적으로 눌러 인공호흡을 시켜주라는 지시였다.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지수 아버지는 차마 보기 딱할 정도였다. 그는 잠시도 아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해 아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아이는 위독한 상태였으며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배깅을 시작했다.

1시간이 흘렀다. 무거운 쇳덩이가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것같은 졸음을 참아가며 배깅을 계속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아이는 선천성 심장병에 백혈병까지 있었다. 그래서 수술도 하지 못하고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가 1년 전부터는 우리 대학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없었으며 아버지가 주로 간호를 했고 고모라는 아주머니가 가끔 다녀가고는 했다.

지수 아버지는 악명 높은 보호자였다. 얼굴은 얽었으며 군대에서 다쳤다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40대 사내였다. 오랜 노동 생활로 인해 투박한 모습이었으나 지수는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얗고 귀공자처럼 예쁘게 생겼으며 영리했다. 그래서 간호사들도 지수는 예뻐했지만 그 아버지가 보통 들볶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툭하면 쫓아왔다. 아이가 열이 난다, 기침을 했다, 토했다, 수액이 안 들어간다, 잘 안 먹는다, 소변을 못 본다, 주사는 언제 놓아 주느냐 등등…. 별것도 아닌 일로 바쁜 인턴을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이 병원에 환자가 지수 하나가 아니잖아요. 그만 좀 얘기 하세요”, “가 계세요. 어떻게 아저씨 아들만 하루 종일 보고 있어요”, “저 점심, 저녁 다 굶었어요.”

나나 간호사들이 핀잔을 하고 성질을 부려도 막무가내였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한 것이 없었다. 필사적이었다. 간호사들과 싸움도 수없이 했다. 간호사들은 아예 표독스러운 ‘승냥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똑바로 해.”

1년차 선생이 내 등을 쿡 찌르고 갔다.

나는 깜짝 놀라 백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2시간이 흘렀다. 이제 졸음은 달아났지만 격심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3시간이 흘렀다. 손바닥 껍질이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손바닥에 불이 났으며 손가락이 아파왔다. 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는 지수 아버지와 수시로 왔다 가는 1년차, 3년차 선생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나는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지수 아버지가 물수건을 갈아주어야 한다며 나갔을 때 아이가 잠시 몸을 비틀며 눈을 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수는 말간 눈빛으로 무언가 찾는 듯 하더니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는 배깅을 계속하였다. 물수건을 갈아 가지고 온 지수 아버지에게 아이가 잠시 눈을 떴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잘못 얘기했다가는 더 극성을 부릴 것이었다.

4시간이 지나고 5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탈진 상태였다. 지겨웠다. 어깨와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날이 밝은지 오래였다. 할 일이 태산같이 밀려 있었다. 수많은 입원환자들의 CBC채혈 IV(정맥주사) 검사 결과 확인, 차트 정리, 오더 처리 정리, 회진 준비 등.

그런데 이 짓을 계속하고 있으니. 아침은 물론이요, 점심, 저녁까지 굶고 또 날밤을 새우게 될 판이었다. 내가 할 일을 누가 대신해 줄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다면 이 지루한 게임이 빨리 끝나고 모든 장비가 철수되기를 나는 바랬다. 어차피 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왜 이런 무의미한 시술을 계속 한단 말인가. 아이가 죽을 것이면 빨리 죽어서 일찍 끝나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이 아닌가. 나는 백 잡은 손에 힘을 빼고 그저 건성으로 눌러댔다.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보호자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배깅을 계속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차 선생이 ECG(심전도)를 찍어 가지고 갔다.

“제대로 똑바로 해.”

3년차 선생은 내게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고 갔다. 인턴은 어디 무쇠 강철 기계란 말인가. 나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손가락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윗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는 힘을 넣어 배깅을 했으며 보는 사람들이 없을 때는 그저 형식적으로 기계적으로 하는 체 했다. 빨리 끝나기만 바라며 배깅을 했다.

마침내 아침 10시가 되었다. 무려 7시간 동안 배깅을 한 것이다. 그리고 10시가 조금 넘어 취프(4년차 수석전공의) 선생과 담당 스탭(교수)이 왔다. 담당교수는 아이를 다시 면밀히 청진해 보고, 후래쉬로 눈의 동공 반사를 보고 심전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익스파이어(사망) 선고를 내린 후,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얼굴로 내려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이의 몸에 붙어 있던 모든 기계장치들과 수액병, 카테터(도뇨관) 등이 일시에 제거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수 아버지의 손에서 툭하고 물수건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그는 눈물도 말라 있었다. 아이는,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알몸의 시신으로 누워 있었다. 지수 아버지의 하얗게 소금꽃핀 뺨 위로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허망함이었다. 그의 입술은 바싹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병동에는 침묵이 흘렀다. 나는 허탈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끝나버린 것이었다. 죽음은 무참한 단절이었다. 이 세상과의 단절이었고 아버지와 아들의 단절이기도 했다. 벌써 오더리(병원 잡일을 해주는 남자직원) 아저씨들이 하얀 시트를 가지고 와 덮으려고 했다. 시신을 영안실로 내리기 위해서였다.

“자, 잠깐만요”

지수 아버지가 제지했다.

“선생님, 아들을 제가 집으로 데려 가겠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더니 핏기 없는 지수의 창백한 이마에 아버지의 부르튼 입술이 서서히 내려 앉았다. 하얀 뺨과 푸르스름한 입술 위에도, 그리고 하얀 뺨 위로 구슬처럼 ‘툭’ 하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태어나서 한번도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본 적도, 장밋빛으로 빛나본 적도 없는 아들이었다. 행여나 깨질세라 소중히 끌어안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목이 메어왔다. 그가 속으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병동은 침묵으로 고요했으며 간호사들도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간호사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수아빠 너무 딱하다….”

얼굴이 얽은 데에다가 다리까지 절어서 연애는 꿈도 못 꿔보고 막노동판으로 전전하며 돈을 모아, 40살이 넘어 중매로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지수 엄마는 지수를 낳은 직후 산후출혈로 죽었으며 아버지가 혼자 키웠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고생 고생해서 모은 돈도 지수하나 살려보려고 병원비로 다 날렸고 그래도 마지막 한 가닥 지수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지수 고모가 커다란 가방에 지수의 소지품을 정리해서 가지고 나왔다. 고모도 쉴새없이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지수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들, 간호사 아가씨들 그동안 너무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랜 세월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힌 손등을 들어 눈물을 훔쳐낸 후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더리 아저씨가 지수의 몸에 흰 시트를 덮어주었다. 나도 그저 꾸벅하고 지수 아버지에게 답례를 했을 뿐 아무 할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아들을 끌어안고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멀어져 갔다. 고모와 오더리 아저씨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고했다며 잠시 쉬고 오라는 3년차 선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도망치듯 병동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인턴숙소로 올라와 침대 모서리에 앉아 허탈한 탄식에 젖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더리 아저씨였다.

“인턴 선생님, 이거 지수 아버지가 선생님께 전해 드리라더군요. 그리고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고 어제 밤에 고생 많이 하셨다고 고맙다는 말씀 꼭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음료수 한 박스와 봉투를 전해준 오더리 아저씨가 힘없이 돌아갔다.

나는 흰 봉투를 펼쳐 보았다. 만 원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은, 침대에 쓰러져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의학의 한계를 얘기하기 전에 최선을 다했는지 부끄러웠다. 환자와 보호자는 나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내가 좀더 열심히 했더라면, 좀더 정성을 기울였더라면 세상에는 기적도 있는 것인데 지수가 살아났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아이가 빨리 죽기를 바랐던 나의 비겁하고 사특한 마음을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내게 진정 의사의 자격이 있는가.

밤새 안절부절하며 물수건을 만들어다 아들의 이마를 닦아주던 지수 아버지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지금쯤 아내와의 추억이 투명한 빛살처럼 떠도는 집안 어느 구석엔가 지수를 뉘어놓고 그 작은 몸뚱어리를 정성껏 닦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내게 이런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돈 봉투는 병원 사무처를 통해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재단에 보내 달라고 맡겼다. 그리고 병원 앞 화원에서 장미꽃 한 다발을 사서 지수가 누워 있던 침대 머리맡에 가져다 놓았다. 침대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지수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헬리콥터였다. 비행기가 나는 흉내를 내며 까르르 웃어대던 지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헬리콥터를 장미꽃 옆에 놓았다. 지수는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2주가 지났다. 병원의 바쁜 시스템 속에서 이제 지수에 대한 아픔도 서서히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즈음 지수 고모가 찾아왔다. 지수의 사망 진단서를 끊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고모 역시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으며 우울해 보였다. 나는 1년차 선생의 지시로 진단서를 대필해 주고 있었다.

“지수 장례는 잘 치렀나요? 화장을 하셨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지수 아빠가 어린 지수가 얼마나 뜨거워하겠냐며 엄마 곁에 묻었어요.”

“그랬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아빠는 잘 지내시나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 돈까지 주고 가시다니 너무 송구스럽군요.”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께서 열심히 치료해 주셨는데요.”

“그래 어디 직장에 나가시나요?”

그러자 고모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닦아냈다.

“지수 아빠는 지수 묻고 사흘 만에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예….”

나는 온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지수 아빠가….”

“지수 없는 세상 너무 쓸쓸하고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며 지수 곁에 함께 묻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각하면 불쌍한 동생이에요”

나는 어떻게 진단서를 써주고, 고모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기억이 없다. 나는 그대로 어두컴컴한 인턴 숙소로 올라와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두 사람을 죽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물어가던 상처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불행하게 떠난 한 가족을 생각하며 나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혼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진정 지수 아빠만큼, 환자인 지수에게 나는 사랑을 쏟았는가’

모든 환자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병동에서 또 나를 호출하고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멀리 히포크라테스 흉상의 두 어깨가 저녁 빛에 젖어 있었다. 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구절들을 가슴 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나는 내 능력을 다하여 환자를 위할 것이며…
...나는 순결과 경건으로 나의 생애를 보낼 것이며 의술을 시행할 것이다.
…나는 순결과 경건으로 나의 생애를 보낼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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