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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가르침 전하는 나무 조회(113)
풀꽃 - 자연 | 2005/09/05 (월) 10:24 추천하기(0) | 스크랩하기(0)
유림의 극진한 보살핌 받으며 200년 역사 지켜 ... 오산시 궐리사 앞 은행나무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화성 궐리사 담장 위로 우뚝 솟아오른 궐리사 은행나무 궐리사(闕里祠)를 아시나요? 바로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이야기합니다. ‘궐리’는 공자가 태어나 자라난 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의 마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충남 논산과 경기 오산에만 있지요.
그 가운데 경기도 오산의 궐리사를 찾았습니다. 유교 관련 건축 문화재로서는 의미있는 곳임에 틀림없지만, 이곳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기에, 안성, 평택 쪽 답사를 목적으로 길을 떠나며, 가는 중에 잠깐 들를 요량이었습니다.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 오산은 이미 도시화가 이뤄진 곳으로 옛 문화재와 그 주변의 자연환경이 온전히 보전됐으리라는 기대가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큰 나무라든가, 유서 깊은 나무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저 궐리사가 어떻게 보전되고 있는지만 보고 지나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심의 복잡한 길을 헤매며 궐리사를 찾았는데, 뜻밖에 멀리에서도 궐리사를 알리는 랜드마크 격의 나무를 볼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공자가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나무일 테니, 나무는 어김없이 은행나무이지요.
기묘사화에 연루된 공자 후손이 지은 궐리사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유림(儒林)들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다친 곳 한 곳 없이 싱그러운 궐리사 은행나무 줄기 오산 궐리사의 은행나무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오산 궐리사의 역사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무가 궐리사의 역사와 함께 하는 까닭입니다.
조선 중종 때 승지, 대사헌 등을 지낸 공자의 64대손 공서린(孔瑞麟)이 조광조를 둘러싸고 벌어진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돼 낙향하여 이곳에 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 데에서부터 오산 궐리사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때 공서린은 서재를 세운 뒤, 근처에서 잘 자란 은행나무를 골라 서재 앞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는 은행나무 가지에 북을 매달고, 학동(學童)을 불러 모으거나 면학(勉學)을 독려하는 수단으로 썼다고 전합니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과 마찬가지로 공서린에게도 은행나무는 후학 양성에 꼭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가 변변한 후계자를 양성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자, 서재는 폐허로 변했고, 그가 심고 애지중지 가꾸었던 나무도 고사(枯死)했습니다. 선비의 뜻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고 사라지게 되자, 학문 연마의 역할을 맡았던 나무도 제 소임을 다한 듯, 생명의 끈을 놓고 만 것이지요.
그로부터 200년도 훨씬 더 흐른 뒤인 1792년(정조 16)의 어느 봄, 공서린과 명을 같이 했던 은행나무가 죽은 자리에서 홀연히 새로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싹을 틔웠고, 유난히 싱그럽게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합니다. 이 마을 선비들은 나무의 돌연한 생장을 들여다보며, 이는 필경 마을에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예언했습니다.
정조, 공자의 성묘 세우라 지시 ... 사원의 역사처럼 소생 거듭하는 은행
이미 도시화한 경기도 오산시의 궐리사 앞으로 펼쳐진 번잡한 도시의 시정을 내다보며 서있는 은행나무 마을 선비들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해 시월,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고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문득 이 은행나무를 발견했고, 또 원래 이 자리가 공서린의 서재가 있던 자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정조는 공자의 후예가 후학을 양성하던 유서 깊은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경기 감사와 화성 부사에게 공자의 성묘(聖廟)를 바로 이곳에 세우라고 지시합니다. 아울러 당시 이곳의 이름이었던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華城府 中逵面 九井村) 대신, 공자의 고향인 궐리촌을 상징하기 위해 궐리(闕里)로 고쳐 부르도록 했지요. 정조는 또한 여기에 세운 성묘에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祀)’라는 사액을 내렸습니다.
이후 고종8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궐리사는 철폐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궐리사를 복원하기 위한 후손과 후학들의 노력은 집요하게 계속돼, 1901년에는 공자의 76대손 공재헌(孔在憲)이 중국에 들어가 공자 성적도(聖蹟圖) 108도를 수입해 보존했으며, 계속적으로 증축과 보수가 이뤄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공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가상하기도 하지만, 더 기특한 것은 나무의 소생입니다. 큰 나무 아래에 씨앗이 떨어졌다가 나무가 죽은 뒤에 싹을 틔운다는 것이 그리 별다른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2백 년이라는 긴 시간 전에 죽은 나무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라면, 2백 년 동안 씨앗이 땅 속에서 소생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되기에 더 놀랍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 개방돼, 언제나 편안히 찾을 수 있는 마을의 정자나무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은행나무 지금에야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이곳 궐리사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는 이 지역 유림들에게 은행나무는 매우 소중한 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무는 그 같은 극진한 보살핌 덕인지, 융융하게 잘 자랐으면서도, 어느 한 곳 아프거나 다친 곳 없이 싱그럽습니다.
나무 아래 새로 지어진 학당(學堂), 양현재(養賢齋)에서는 여전히 공자의 교학사상을 이어가기 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한 학생들의 인성(人性) 교육을 비롯해,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다도(茶道), 서예(書藝), 예절 교육 등이 그것이며, 그 연장으로, 해마다 효자 효부, 선행 어린이 표창 사업 등도 활발히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들고나듯, 자신에게 생명과 삶의 뜻을 부여해 준 사람과 함께 명(命)을 같이 했던 나무 한 그루는 그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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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재 김용문 선생님은 오산출신으로 유명하신 도예가 이십니다.
오산의 궐동에 빗재가마를 여시고 세계막사발 축제를 몇해째 오산에서 개최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