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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이씨의 시조 이지란의 사당이 있는 오산 누읍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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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영대
댓글 0건 조회 1,032회 작성일 08-08-17 22:13

본문

여진족으로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어 후에 청해 이씨란 성을 하사받아 완전한 조선인으로 귀화한 이지란 장군의 사당이 바로 오산시 누읍동에 있습니다.


성심동원 옆골목으로 올라가면서 야트막한 언덕너머에 있어 눈에 잘 안띄인다고 합니다. 또다시 개발이 되게 되어 결국 용인으로 옮길예정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태조 이성계를 전주 이씨로 보기보다는 여진족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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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사람으로 태어나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이 된 - 이지란 사당

사람이 나서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의 모든것을 걸어도 좋을만큼 반할만한 단 한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닌가 생각한다.

TV드라마 \'용의눈물\'에서 이지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군은 원래는 여진사람으로 공민왕때 자기 휘하의 백여호를 이끌고 북청에 와서 살면서 이성계의 사병이되었다가 기어이 자신의 국적도 버리고 고려에 귀화하여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으며 우리나라의 청해이씨의 시조가 되는 특이한 인물이다.



청해 이씨 사당

이렇다할 역사적 유적이 드문 오산을 문헌에서 뒤지다 보니 이력이 아주 특별한 이지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하여 반갑게 찾아가니 조선의 개국을 도와 일등공신에 올랐을 뿐 아니라 이나라 사람이 되어 이땅에 뼈를 묻은 옛공신의 사당이라고 하기에는 행색이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이 없어 어디에라고 할것없이 드는 배신감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왕 이렇게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인물을 찾아 나선 길이니 유적이야 거론할 가치도 없지만 이지란장군은 만만치 않은 매력을 지닌 인물이어서 그의 삶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이지란은 앞서도 말했듯 중국 남송 악비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 아라부기의 아들로 태어난 본명이 \'두란첩목아\'라는 여진 사람이다. 북청에 들어와 살다가 이성계의 기상에 반하여 자신의 뿌리인 조국을 버리고 아예 고려인이 되어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는데, 둘의 인연을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부인으로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 혜안택주 윤씨를 맞으면서 인척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고려 우왕 6년에는 이성계의 편장이 되어 그 이름도 유명한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무찌르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후로도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하는 현장에 늘 함께 하면서 고려왕조의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어 고려사람으로 자리를 잡아 간다.

1388년 조선 건국의 초석이 되는 위화도 회군에도 참가하여 회군일등공신에 봉해졌고, 1392년에는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의 여진추장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하여 청해백에 봉해지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개국일등공신 청해군에 봉해지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을 밟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전날의 왜구를 물리쳤던 경험을 살려 경상도 절제사가 되어 왜구방어를 담당하게 된다. 그가 조선에 세운 공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번거로울 정도로 다양하여 그에게 주어졌던 직함도 부지기수인데, 특히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등극하는 과정에서 형제간의 피를 부른 \'제 1,2차 왕자의 난\'에서 두번 모두 이방원의 편에 서서 공을 세우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에 처음으로 이성계의 뜻을 거스러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면 철저한 이성계의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대세를 정확하게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줄도 알았던 대장부적인 기질이 잘 보여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형제들의 피를 재물 삼아 왕이 된 이방원을 등지고 태조가 영흥으로 은퇴하자, 이지란도 풍양에 은거하면서 수많은 왜구를 섬멸하였던 남정에서 그리고 북벌에서 많은 살상을 한 것을 뉘우쳐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전쟁에서의 살상이야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니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아마도 애써 이룩한 새 왕조에서의 형제간의 살육은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허탈함을 그에게 가져다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상을 뉘우친다는 핑계로 불교에 의탁하게 된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하게되는 것이다.

장군의 묘소는 처음 이땅에 귀의한 함경남도 북청군에 마련되었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오산으로 뻗어 있는 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오산시에 이르면 1번 국도를 버리고 82번 지방도로를 따라 발안방향으로 난 오른편 길을 조금 가다보면 여기저기 아파트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는 곳에서 \'가수동아파트\'라는 작은 입간판이 보이는데, 장군의 사당은 그곳의 야트막한 야산에 겨우 기와 지붕만이 사당의 흉내를 내고 오두마니 단 한채의 건물로 서 있다. 그나마도 아파트 높이만한 상가들이 야산을 막고 있어 애써 찾지 않으면 바로 코 앞에 두고도 한참을 헤매야 하는데,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이지란 사당이라고 하면 고개를 가로 저어며 이씨네 사당이라면 저기쯤 있다고 가르쳐 준다.

그래도 사당이 서 있는 곳에서는 아래로 내려다 보는 눈맛이 제법 시원하게 펼쳐지는데, 오산시내의 높은 공장 굴뚝에서 연신 허연 연기들이 내뿜어져 나오는 것이 훤하게 보인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데도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시멘트 담장을 갈무리한 초록색 철 대문에는 큼지막한 자물쇠가 무겁게 매달려 있다.

가문을 중요시 하는 사회풍토상 왠간만 하면 청해이씨 문중에서라도 격식을 갖춘 번듯한 사당 하나쯤은 가져도 흠잡을데가 없는 인물임에도 이렇게까지 방치된것을 보면 아마도 후손들이 이름을 그리 날리지는 못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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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침략한 왜구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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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들의 본격적인 난동은 고려 고종 10년(122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왜구는 함선 2척을 거느리고 나타난 도적단에 불과했다. 또 이때부터 향후 충숙왕(忠肅王)연간까지 10여 회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왜구의 세력은 점차 커져서 충정왕의 재위기간 2년 동안에는 11번 고려를 침략했고, 공민왕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115회의 침입이 있었으며, 우왕 재위 시에는 무려 378회나 침략해왔다.



?왜구는 점차 해상순찰로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대형화되었다. 이들은 해안지방을 침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내륙지방까지 공격했고, 수도인 개경에까지 진출하여 수도방위부대가 출동하는 일까지 있었다. 1350년 고려의 정규군이 출동하여 왜구 3백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고, 1337년에는 왜구가 개경 근처까지 나타나자 이에 놀란 우왕이 천도까지 고려했을 정도였다.



?지칠 줄 모르고 고려에 나타났던 왜구들은 1380년 5백 척의 대선단을 동원해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이들은 고려를 괴롭혔던 왜구 중 가장 규모가 큰 아지발도가 이끄는 부대였다. 고려는 진포에 상륙한 이들을 끈질기게 추격하다가 마침내 지리산 근처의 황산에서 모두 격멸했다.



?이때 동원된 왜구의 규모를 보면 왜선(세키부네)의 크기는 15미터에서 20미터 정도였고, 10명에서 14명 정도의 군사가 탑승할 수 있었다. 단순 계산으로 보아도 500백 척의 배를 타고 온 왜구의 수는 약 5천에서 7천 명 정도이다.



?한편 <<고려사>>에는 황산(荒山) 전투가 종료된 후 1천 6백 필의 말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5백 척의 선단에는 세키부네(중형 쾌속선)뿐만 아니라 마필을 수송하기 위한 거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고대 전쟁사에서 일반적인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2.5 : 1 에서? 4 : 1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왜구는 1천 6백 명의 기병과 함께 4천에서 6천 4백 명 정도의 보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왜구의 병력은 대략 5천 6백에서 8천 정도였을 것이다. 여기에 조함을 위한 선원을 비롯한 기타 수송인원까지 합하면 왜구의 규모는 1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일 해적집단이 5백 척의 함대와 1만 명에 가까운 인원을 거느린 경우는 없었다. 1380년 고려는 단순 해적집단이 아닌 거대 전투부대와 결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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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해전과 1차 토벌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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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년 6월, 왜구의 대규모 선단이 진포(현재의 군산)를 노리고 전라도 해안에 나타났다. 정규 수군이 부족한 고려로서는 대규모 왜구의 선단을 상대하는 것이 버거운 일이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사용하여 이들의 선단을 불살라버리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고려는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라세, 부원수 최무선의 지휘 하에 화포로 무장한 1백여?? 척의 함대를 출전시켰다. 고려군은 진포에 상륙한 왜구의 주력군이 조창을 약탈하러 갈 때까지 기다린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왜구들은 일단 배를 모두 밧줄로 연결한 다음 수십 대씩 편대를 이뤄 반격을 시도했다. 이들은 고려의 신무기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고전적인 해전 양식으로 승부를 걸고자 했다.



?고려 수병들은 소형의 포에 철탄자(작은 철환)와 피령전(작은 화살)을 장전하고, 대형화포인 대장군포와 철질려통을 준비하여 왜구들의 공격에 맞섰다. 활의 사정거리 밖에서 쏟아지는 고려군의 화포 앞에 왜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함선은 연이어 주화(화약통을 장착한 화살)를 발사하며 가까이 다가가 철질려통을 왜구의 함선에 던져 넣었다. 철질려통이 폭발하자 밧줄로 연결되어 있던 왜구의? 함선은 순식간에 모두 불타버렸다. <<고려사>><라세열전>에는 이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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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세 등이 진포로 가서 최무선 등이 만든 화포를 써서 적선을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고, 지키고 있던 적병은 거의 다 타 죽었으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도 역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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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단으로부터 도망쳐 온 병사들에게 이 소식을 들은 왜구의 수뇌부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왜구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나 큐슈로 돌아갈 수단과 해장 지원로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셈이었다. 내륙에 고립된 왜구들에게 남은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탈출로를 모색해야 했고, 고려군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이에 왜구의 대장 아지발도는 정면 승부를 거부하고, 개경을 위협하여 협상을 벌이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모두 탈출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숫자의 선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먼저 상주, 영동, 옥천 등지로 흩어져서 약탈을 감행했다. 이때 상주 방면으로 나간 왜구들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단시간 내에 흩어져 있던 인원들을 모두 집결하여 추격하던 고려군을 역습했다. 이 싸움에서 왜구들을 쫓던 5백 명의 고려군은 모두 전사했고, 고급 지휘관 두 명까지 사망했다.



?왜구들은 계속해서 전면전을 피하며 산을 따라 움직이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이들은 병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게릴라처럼 움직였고,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전면전에 응했다. 왜구의 횡행은 그 해 9월까지 계속되어, 현재 남원 소재인 운봉현을 불태워버리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왜구들은 개경을 공략할 것임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다녔다. 고려는 이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구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았고, 빠져나갈 선박과 함께 가지고 갈 물자까지 요구했다. 이들은 고려 조정을 지치게 만들어 그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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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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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왜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면 그 결과는 더 심각했을지도 모른다. 왜구들은 그들의 본거지로 무사히 돌아간 다음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쳐들어올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려가 수년에 걸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고려는 곧 2차 토벌군을 편성했다. 여기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변안열(邊安烈)이 제찰사(제察使)로 임명됐고, 우인열, 이원계, 박임종, 도길부, 홍인계, 임성미 등으로 지휘관이 구성됐다. 이때 이성계는 퉁지란을 비롯하여 자신이 동북면(현재 함경도)에 있을 당시 양성한 사병들을 대거 동원했다.



?고려 말 신진 무장세력이 커지게 된 데에는 사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병의 전투력은 정규군보다 월등했다. 고려는 원의 압제 때문에 뛰어난 정규군을 양성할 수가 없었고, 사병들은 전란이 그치지 않던 동북면에서 단련된 정예병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성계의 사병들은 여진족으로 구성된 거칠기로 이름이 난 부대였다.



?병력이 부족하던 고려 조정은 이성계가 사병을 동원하는 것을 묵인했다. 더군다나 1차 토벌작전에서 정규군들이 상주와 홍주 등지를 왜구에게 내주는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적의 기습작전과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고려 조정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2차 토벌군을 형성하자 왜구들은 항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대거 병력이 출동하자 산악전으로 맞섰다. 운봉현에서 나온 왜구들은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에 황산의 정산봉 꼭대기를 점령한 다음 목책을 설치했다.* 삼면이 절벽인 정상봉에 목책을 설치하자 난공불락의 요새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목책안에서 불을 붙인 목재 뭉치나 통나무, 큰돌을 굴려보내면서 고려군의 발목을 묶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뛰어난 전략을 짰다. 그는 주화(로켓이 달린 불화살)를 발사하여 목책을 공격하게 했는데, 주화는 목책에 박혀 화재를 일으키기도 했고, 왜구의 진영으로 넘어가 천막을 불태우기도 했다.



?믿었던 목책마저 무너지자 왜장 아지발도는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가만히 앉아서 불에 타 죽기보다는 고려의 포위망을 뚫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방어에 유리했던 정산봉(鼎山峰)의 지형이 반격을 하는데 있어서는 엄청난 장애물이 되었다. 왜군이 나아갈 방향은 한 곳밖에 없었고, 고려군은 그곳만 집중공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지발도는 궁지에 몰린 왜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돌파작전을 지휘했다.* 적장은 궁수의 표적이 되어 집중사격을 받기 마련이지만, 혼전 중에 조준을 정확히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화실이 두터운 갑옷을 관통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지발도는 이성계와 그의 부하 퉁지란의 뛰어난 궁술 실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전설에는 퉁지란이 화살을 쏘아 단번에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리자 이성계가 그의 입을 맞추었다고 전한다.



?아지발도가 쓰러지자 전투의 판세는 한꺼번에 결정났다. 지휘관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본 왜구들은 사기가 떨어진데다 지휘체계마저 흔들려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무질서하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전쟁사에서는 자주 일방적인 승리에 따르는 대학살을 지켜보게 된다. 왜구들은 고려군에 의하여 거의 전멸하였고, 이때 도망친 왜구의 수는 겨우 7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리산 기슭은 왜구의 시체로 가득했고, 황산 근처의 냇물은 왜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1380년 고려는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승리했지만 왜구에 의한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왜구는 고려의 국가 경제를 파탄지경에 이르게 했고, 그러한 와중에도 고려는 왜구를 경계하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들여 군사와 함선을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고려는 오백 년이나 사직을 보전시켜왔다. 그러나 왜구라는 강력한 해상 범죄집단의 횡행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타격을 주었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왜구의 출몰로 인하여 크게 좌절됐다. 왜구의 출몰은 결국 고려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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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남북조 전쟁에서 흔히 쓰이던 작전이다.


남북조의 명장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이 전술을 사용하여 북군을 여러 차례 물리쳤다.



*알렉산더 대왕도 페르시아군과 싸운 그라니쿠스강 전투에서 선봉에 나선 적이 있다.


이때 적병의 도끼 공격을 받고 투구가 거의 반으로 잘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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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이지란의 관계는 재미있습니다.


활을 잘 쏘던 이성계와 이지란이 시합에서 이지란이 지게되자 자기보다 4살이나 위임에도 형님으로 모시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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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활솜씨가 뛰어나냐하면 물을 길어 머리에 지고 가던 아낙네의 물동이를 이지란이 활을 쏘아 맞추어서 물이 새는데 이성계가 솜을 감아 활을 쏘아 틀어막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잘 쏘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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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장수 아지발도를 무찌를때에도 이지란이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중무장한 투구를 벗기니 이성계가 얼굴을 명중시켜 죽여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황산대첩을 이끌어 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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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과 인연을 맺어 충성을 맹세하고 그와 더불어 성공하였을때 그는 오랑캐의 신분에서 조선인의 신분이 되었고 왕으로부터 청해 이씨라는 성도 하사받아 성공한 귀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은 이제 이 작은 도시 오산의 보이지 않는 사당에서 쓸쓸히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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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주는 부귀 영화와 번영을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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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어 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들이 번성하여 그 자손들이 오늘날 미국의 모든것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를 주인으로 삼고 충성을 다 하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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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주님의 축복받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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