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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소식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로 소통하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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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경종_osanch
댓글 0건 조회 171회 작성일 22-11-1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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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코로나의 재난은, 교회인 우리 자신의 허약한 측면을 확연하게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 약한 부분을 깊이 깨닫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의 적대감’을 맞닥뜨리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인데, 그 원인 중 하나는 교회가 사회 속에서 자주 ‘악행 하는 집단’처럼 비쳐진다는 뼈아픈 현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목회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다소 ‘억울한’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사실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어두운 곳, 소외된 분들, 어려운 가정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주려 애쓰는 일에 있어서, 교회만큼 열심인 단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였고,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지금껏 이어져온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미운털’이 박힌 것처럼 ‘이토록’ 성장률도, 신뢰도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는 것일까? 언제부터 교회는 사회 속에서 이처럼 ‘몰상식하고, 불법적이고, 불의한’ 집단처럼 비난을 듣곤 하는 것일까? 이러한 사회의 적대감을 단지, 몇몇 잘못된 지도자들이나 극단적인 교회들 때문이라고 묻어두어도 되는 것일까? 혹은, 우리 사회에서 반反기독교적 정서를 부추기는 자들은 모두 ‘극좌파요, 네오맑시스트’들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혹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우리에게 연약한 면이 있다면 분명하게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핑크빛 소망의 미래를 노래하기 전에, 교회가 잘못 가던 길이 있다면 반드시 돌이켜야 한다. 확실히, 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바뀌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우리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선도(先導)적인’ 그룹, 존경받고 신뢰받는 ‘다수’(多數)가 아니다. 흔히, 교회의 ‘황금시대’가 지나가고 있다고들 한탄하는 그대로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시점과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당장,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딪히는 ‘사회적 적대감’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 속에서 받는 비난의 내용이 무엇인가? 코로나가 극심해졌을 때,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았던 비난의 내용이 무엇이었던가? 한마디로 하면, 교회가 ‘악행(惡行)한다’는 비난이다(참조. 벧전2:12). 아니, 교회가 무슨 악행을 하는가? 그 진짜 의도가 어찌 되었든지, 또 사실이었는지 과장된 것이었는지, 면밀한 조사와 평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코로나 기간 동안 교회는 사회로부터 ‘몰지각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양심적인’ 집단처럼 비난받았다는 현상이다.

사회가 교회를 비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초기교회 성도들은 단지 그들이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무신론자들, 인류의 적들, 상종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께 대한 충성 때문이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불의’(不義)나 ‘불법’으로 비난을 받는 일은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왜 예수 잘 믿는데, 세상 사람들이 상식으로도 지키는 일을 못 하게 될까? 왜 천국 간다고 확신하고 교회 생활 잘하는데, 그리고 더러는 목회도 크게 성공했는데, 세상에서는 불법, 탈법, 비양심적인 일들로 비난받는 일들이 생길까? 이 부분에서 우리는 윤리운동을 하고, 열심히 실천을 해서 앞으로는 점점 더 나아지도록 노력하면 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보다는 더 깊은 ‘신학적’이고도 ‘교회론적’인 수술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런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예수 믿고, 복 받고, 천당 가는 것’으로 정리되면, 세상에서 굳이 ‘선한 양심으로, 선한 행실로 살면서, 때로는 손해도 보고 고난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쉽게 찾지 못하게 된다.

혹시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을 ‘내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나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하는 한, 그것은 근본적인 답이 되지 못한다. 한국교회는 이미 성장도 해봤고 복도 받았지만, 여전히 ‘악행 한다’는 비난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만일 ‘복음’이라는 것을 ‘율법 아래서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저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으로 정리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으면, 도대체 세상 속에서 ‘선한 양심으로, 선한 행실로 애쓰며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악하게 살아도, 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복음’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만 아니라, 부활의 복음,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의 복음, 그리고 무엇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음’이 더 자주 선포되어야 한다. 복음이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얻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벧전1:3-4; 벧후1:11; 3:13). 그래야, 아무리 화려하고 유혹적이고 또한 위협적인 세상 앞에서라도, 이 세상은 본질상 ‘더럽고 썩어지고 허무한 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지나갈 수’ 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예수 믿고 받은 복과 세상을 놓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을 비양심적인 일들과 불법, 불의를 그칠 이유를 찾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살게 되어 있다(벧전2:12). ‘신전(神前) 의식’도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은 더욱더 ‘이방인들 속에서’ 우리가 짊어진 하나님의 이름이 과연 ‘어떤 평판을 받는지’에 대한 깊고 예민한 의식도 절실한 것이다.

이 땅에서 교회가 짊어진 하나님의 거룩하고 큰 이름을 교회인 우리 자신이 더럽힌다면, 우리를 둘러싼 이방인들이 어떻게 그 이름을 부르며, 어떻게 그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겠는가? 오늘날 신학과 신앙의 가장 큰 주제는, 교회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해묵은 ‘칭의론’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왜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양심, 선한 행실’이 중요한가?

이런 질문 앞에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다’라는 답은, 맞지만 틀리다. 구원은 당연히 은혜의 선물이다. 생명을 자기가 스스로에게 낳아주는 사람이 없듯이, 영적 생명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교회는 굳이 오늘도, 내일도, 이 땅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양심’(良心)으로 구원 못 받는다. 하지만, 세상 속의 교회에게 ‘선한 양심’은, 교회를 둘러싼 이방인들과 소통하는 결정적인 통로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며, 동시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저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오는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 공동체’이다. 주여! 우리에게 복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세상 속의 교회’로서 새로운 사명에 눈뜨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 그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로 소통하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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